손 정 순
아지랑이 만취한 서초동 꽃길 따라
생사(生死)와 키재기하는 법원 길로 들어서면
빚처럼 술술 불어난 변호사 사무실 신축공사장
아버지의 푸른 나날 켜켜로 쌓아올린
저 높은 곳의 소망, 울음 쌓은 성채의 꿈이
아직은 한숨 속으로 무너질 때가 아닌데,
언제부턴가 빈사람 수만큼 민들레꽃 피어나고
포클레인 굉음에 무서워 잠 못 드는 밤
건넌방 아이들은 저 아래로 늘어난 고층 불빛
말없이 바라본다
시인이 스무 살 되던 해 그녀는 서초동 꽃마을에서 대학생들이 운영했던 공부방에 서서 이 시를 썼다. 그곳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겨우내 버텨내던 시린 삶들도 사라져간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다. 철거반원들이 무지막지한 강제와 무참하게 꺾이고 무너져 내리던 아이들의 꿈…. 이런 것들을 목도한 젊은 시인의 아픈 기억들이 참참하게 펼쳐져 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