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을 2년 앞두고 왜(倭)에 통신사로 건너가 토요토미의 저의를 살피고 돌아온 사절들은 상반된 보고를 했다. 서인인 정사 황윤길(黃允吉)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고 복명했다. 문제는 보고를 접한 조관들이었다. 그들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자기 당파의 사절을 비호하는 데만 열중했다. 결국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일마저 중단토록 하였다.
파란만장한 정치여정을 겪고 있는 김부겸이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간판을 달고 나와 `대구의 변화`를 외쳤지만 분루를 삼켰다. 적진 심장부나 다름없는 대구에서 분전한 김부겸의 열정은 많은 감상을 남긴다. 그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는 동안, 웬일인지 온실 속을 맴도는 듯한 안철수의 행보가 자꾸만 교차되어 떠올랐다. 이번 선거결과를 놓고 과연 김부겸은 `실패`했고, 안철수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반대로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김부겸은 운동권 출신이다. 한나라당 소속 16대 국회의원(경기 군포)으로 있으면서도 국가보안법 폐지 등 소신을 펼치다가 2003년 `대북송금특검` 사건 때 반대표를 던지고 탈당하여 야당으로 돌아섰다. 그 후 그는 17~18대 두 차례나 더 당선됐다. 이번 선거에서 김부겸은 40.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미 지난 2012년 총선 때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40.42%의 지지표를 일궈냈던 그가 광역시장 선거에서도 거의 같은 득표율을 기록한 일은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서울 동작갑에 출마해 고작 3.25%의 득표로 낙선했던 기록을 포함하여 김부겸은 이제 4번째의 낙선 이력을 만들었다. 적지 한복판에 뛰어들어 피를 철철 흘리며 다져 올린 그의 내공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김부겸의 성취는 단순한 숫자의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한때 많은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던 안철수는 이번 선거에서 자신이 전략 공천한 후보를 건져내기 위해 야당 핵심 정치기반인 광주로 달려가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읍소를 하기에 급급했다. 선거 이후 안철수에게 쏟아지는 평자들의 비판은 냉혹하다. `안철수 현상에서 자신의 이름인 안철수를 스스로 지웠다`는 혹평에서부터, `이젠 새 정치의 상징이 아닌, 현실 정치인 안철수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됐다`는 한탄에 이르기까지 잔인스럽기까지 하다. 최근 그의 측근으로부터는 `안철수는 변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고백도 들었다.
김부겸이 이제부터 신경 써야 할 일은 진보정당의 낡은 체질 개선이다. 이번 지방선거만 하더라도, 새정치연합은 대안정당으로서 국민들에게 다가가기보다는 반대를 위한 `선동`에만 몰두하다가 대승을 거둘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그에게는, 보수정당 안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던 `용기`와 진보인사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박정희기념관`을 짓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놓고 밀어붙이던 `패기`가 더욱 필요해졌다.
나랏일을 놓고 매사 붕당의식의 잣대로 찬반을 결정하여 벼랑 끝 대치전선을 만들어내는 우리 정치풍토는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남북대치와 경제전쟁과 부조리 속에서 위태롭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좀 더 안전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입은 조선의 인명피해는 무려 24만 명(전사 7만 명, 부녀자포로 2만여 명 포함)에 달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는 남은 농토가 고작 3분의 1밖에 되지 않아 민생의 피폐는 실로 처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김성일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는 `반대를 위한 반대`에 찌든 패거리 정치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