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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꿰뚫는 통찰… 읽는 재미 쏠쏠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3-11-22 02:01 게재일 2013-11-2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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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시편` 고은 지음 창비 펴냄, 1016쪽

`세계적인 시인`이라는 호칭마저 새삼스러운 고은 시인이 한국문학사에서 획기적인`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묵직한 시집 한권을 새로 내놓았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연시집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을 동시에 펴낸 지 2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 `무제 시편(창비)`이다. 이번 시집은 총 607편, 1016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분량으로 우선 압도적인 대작이다. 더구나 이 엄청난 시들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고작 반년 만에 씌어진 것으로 여든을 넘기고도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폭발하듯 분출하는 시인의 창작열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광활한 시공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도저한 사유와 유장하고 분방한 언어로 완성된 이 거대한 시집은 가히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 시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위업이라 할 만하다. 

▲ 고은 시인

“옛 시에서는 `곳(處)`이 `때[時]`이다. 이 말이 후대의 내 말인 줄 누가 알았으랴. 나에게 시의 `때`가 곧 시의 `곳`인 것.// `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즉각의 자문자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정녕 이렇다면 시는 죽음 앞에서, 죽음 속에서 시이다. 궁극도 근원도 굳이 필요 없다.”(`서문`부분)

시집은 `무제 시편`과 `부록 시편`으로 구성돼 있다. `무제 시편` 539편, `부록 시편`68편, 모두 607편, 10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시집이다. 더욱이 `무제 시편`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불과 반년 만에 씌어진 전작 시편이다. 수치로 따지자면 하루에 3편꼴로`쏟아낸` 셈. 시인은 올해 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주로 체류하면서 4월 이탈리아 까포스까리 대학으로부터 명예 펠로십을 받고 5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했으며, 8월에는 칭하이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중국을 방문하고 9월에는 22일간 시베리아를 열차로 횡단하기도 하는 등 세계 시단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렇게 유럽과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곳곳을 오가는 여행과 체류의 사이에 폭발하는 열정으로 쏟아져나온 것이 이`무제 시편`이다.

시인은 시집 서문에서 이 경험을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렸다”라고 돌이킨다. 그러나 `만인보`가 그러했듯이 이 시집 또한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꿰뚫어보는 예감과 시대에 맞서는 투철한 역사의식, 삶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이 어우러진 우주적 상상력의 시세계는 물론이고 가히 초인적이라 할 만한 이 `청년 시인`의 식을 줄 모르는 창작열에 경탄해 마지않을 것이다.

`무제 시편`을 통해 시인은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도저한 시정신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으며 한편 한편 비범한 시적 사유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추천사에서 이를 “찰나에서 찰나로 미끄러지는 죽음의 시편이요, 그 찰나 찰나가 해탈의 이행(履行)으로 되는 초월의 시편”이자 “자유, 대자유, 마침내 자유조차 잊는 그런 자유함”이라고 찬탄한다. 시를 둘러싼 모든 편협과 속박마저 떨치고 `시의 모국어`라 할 드넓은 대지를 탐사하는 이 대시인의 발길은 달리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 시의 독보적인 성취이자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 시사에서 유례가 없는 위업이라 할 만하다.

시인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서 온 생애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뇌하며 세상 만물과 “어제의 나/그저께의 나만도 못한 오늘”(`무제 시편 63`)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고, “언제까지나 목마른 세상 내려다보”(「무제 시편 6」)면서 “만성(慢性)의 번뇌 행렬”(`무제 시편 1`)을 좇아 “더 가야 할 시의 길”(`서문`)을 찾아 나선다.

이어지는 `부록 시편`은 `무제 시편`과는 별도로 `상화 시편`과 `내 변방은 어디 갔나`이후 발표한 근작시를 간추린 것이다. `부록`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한 권의 시집으로 묶기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시인 역시 애초에 `무제 시편`과는 별도로 엮을 생각이었던 것을 “안성 시대를 마감하는 내 최근의 동정(動靜)에 따라 부록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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