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쌓고 사는 자 기필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 살아남을 지어다”
유라시아를 호령하며 누볐던 돌궐 건국의 명장 톤유쿡의 비(碑)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우리 모두가 안팎으로 더 열린 공간으로 나아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생존하는 지금, 마음에 새길만한 의미심장한 글이 아닌가?
새로운 맥락과 새로운 차원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오래된 신대륙-유라시아`의 의미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지리적으로는 최서단 포르투갈 로카 곶에서부터 최동단 북동시베리아 테즈네프 곶에 이르는 지역으로, 세계 육지면적의 3분의 1, 세계인구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지역이다. 이 드넓은 공간에서 다양한 문명이 발전했고, 수많은 제국이 일어났다 쓰러졌고, 실크로드를 통해 문명 간의 교역과 교류가 이뤄졌다. 21세기 새로운 세계질서 변화의 중심에 선 유라시아 국가 중에서도 특히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인도의 행보에 시선이 모아지는 이유는 왜인가? 이 국가들이 `세계경제의 성장판`을 다시 열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지난 18일 박근혜 대통령이 `유라시아 시대의 국제협력`콘퍼런스의 기조연설에서 제안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러시아를 지렛대로 삼아 유라시아 공동경제권 구축에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나의 대륙·창조의 대륙·평화의 대륙`으로 유라시아 미래의 모습을 설정한 박 대통령은 이를 실현할 구체적 프로젝트로 먼저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를 제안했다. 그 다음으로 유라시아 에너지 네트워크 구축을 제안했다. 유라시아 공간 내 에너지 인프라스트럭처를 서로 이어주면서, 중국 셰일가스와 러시아 동시베리아 석유·가스를 공동개발하자고 강조했다. 나아가서 북한 참여를 유도해 유라시아 단절 구간인 북한 문제까지도 해결하겠다는 복안을 피력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유라시아 단일시장 구축을 제안했다. 한·중·일 FTA를 가속화하고, 이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의 유라시아 역내외를 아우르는 무역협정과도 연계한다면 거대한 단일시장을 만들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필자는 경북매일의 10월7일자 칼럼 `낯설게 하기와 대한민국號의 향방표지 읽기`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유지되어 온 전후 체제의 근간까지 흔들고 있는 미·일 안전보장협의회 공동 발표문 및 합의사항에 대해 분석하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일본 군국주의에 침략을 당했던 한국과 중국으로서는 이 상황을 어찌 맘 놓고 바라보기만 하겠는가? 북한은 어떤 식으로든 반발하지 않겠는가? 이 상황에서 러시아까지 일정한 역할을 하고자 나선다면?” 2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동북아시아 상황과 관련해서 쏟아져 나온 칼럼들의 내용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여서 난처한 상황이다`, `등거리냐? 양다리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정상 만나야 한다`, `그래도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중국에다 물건 팔고, 미국 눈치만 볼 건가?` 등등이다. 러시아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글은 찾아보기가 드물었고, `아베 보란 듯... 올해 다섯 번째 만나는 시진핑·푸틴` 기사 정도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지난 18일 박 대통령이 제안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무엇보다 러시아의 다양한 역할을 기대하며 러시아와의 외교 강화를 1순위로 삼고, 오는 11월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보다 구체화시켜 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녹아 있어서 반갑다. 한반도의 평화와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출구전략`이라서 더 반갑다. 대한민국號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중국과의 협력과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 이제 `한·미·일 대(對) 북·중·러`라는 `관계의 이분법`은 폐기돼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號가 한·미·일 관계에서 균형을 잘 잡아나가는 한편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지렛대로 삼아 북한을 이끌어낸다면, 한반도 평화통일의 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세계경제의 성장판을 다시 여는 국가로 우뚝 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