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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이산가족

등록일 2013-09-24 02:01 게재일 2013-09-2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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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 편집국장

이산가족 상봉이 자꾸만 늦춰지고 연기돼 애간장을 녹인다. 남북은 당초 금강산에서 오는 25~30일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개최한 뒤 11월 중에 추가 상봉 행사를 가질 계획이었다. 또 이와 별도로 내달 22~23일 `화상 상봉`도 갖기로 했었다. 그러나 북한이 상봉 행사를 돌연 연기한다고 통보함에 따라 11월 행사와 화상 상봉 행사의 성사 여부가 불투명하게 돼 이산가족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1천만명으로 추산되는 이산가족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비롯된다.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고아들, 생이별한 가족들을 낳았다.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KBS 방송을 통해 북한 조선적십자회에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 개최를 전격 제의하면서 시작됐다. 1985년 광복 40주년을 맞이한 그 해 9월 예술공연단과 역사적인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교차 방문이 진행됐다.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 적십자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와 운영, 면회의 정례화, 한국전쟁 행방불명자의 생사 확인 등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단한 성과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60%라는 전무후무한 시청률을 기록한 KBS 생방송 프로그램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어떤 감동적인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많은 눈물을 자아냈다. 1983년 6월 30일 처음 전파를 타기 시작해 장장 138일간 진행된 방송을 통해 10만 952건의 이산가족 찾기 신청이 들어왔다. 출연자만 해도 5만명이 넘었고, 방송기간 동안 총 1만 189명의 이산가족이 핏줄과 재회했다. 2000년 6월 15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직접 방문해서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을 협의했고, 2010년까지 총 18차례의 이산가족 대면상봉과 7차례의 화상상봉이 진행됐다.

1천만 이산가족 가운데 이산가족정보 통합시스템에 이산가족으로 등록하고 상봉을 기다리는 신청자는 7월말 현재 총 12만9천35명. 이 가운데 80세~89세까지 사망자는 2만3천89명(40.8%)이고, 90세 이상은 2만6천588명(47.0%)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이산가족 교류현황을 보면 지난해 말 현재 당국차원에서 방남·방북상봉을 한 가족은 각각 2천700명과 1만5천443명, 화상상봉 3천748명을 포함해도 2만1천891명에 불과하다. 민간차원에서 상봉한 3천387명을 합쳐도 2만5천여명에 불과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필자의 아버지는 평안북도 정주군 대전면 하일리 41번지가 고향으로, 이산가족에 해당한다. 6.25전쟁때 낙동강 전투에서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어 국군에 포로가 됐던 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방침에 따라 석방된 뒤 국군에 입대해 3년여를 복무한 후 남한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2남3녀 가운데 막내였으며, 20살 위였던 둘째 형님의 경우 이미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측돼 친하게 지내던 동년배의 조카들을 만나려고 이미 수년전 상봉신청을 해놓았단다. 그러나 아직 감감무소식이란다. 아버지는 “90세가 넘은 고향 분이 최근에서야 아들과 만나게 될 만큼 이산가족 상봉은 지지부진하다”면서 “살아 생전 상봉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이산가족 1세대는 모두 스러지고 말텐데…”라며 갑작스런 상봉연기 소식에 안타까워했다.

상봉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이산가족 소식이 세인의 안타까움을 더한다. 꿈에 그리던 북녘 딸 상봉을 엿새 앞두고 90대 할아버지가 숨졌다는 언론보도가 그것이다. 갈수록 빠르게 스러지는 이산가족 1세대를 생각하면 이산가족 상봉문제는 최우선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이는 결코 정치적인 협상대상이 돼선 안된다. 정부도 이산가족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든 양보하겠다는 대승적인 마음으로 접근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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