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 이후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보르헤스의 유명한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를 도서관에 비유한 매우 상징적 작품이다. 비교가 적절할진 모르겠으나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이 필자에겐 극장이다. 유년시절부터 극장은 나의 우주였다. 극장에서 만난 영화와 연극, 배우들과 가수들은 곧 내 자신이었다. 필자의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에는 죽도시장과 죽도성당 사이에 국제극장이 존재했고, 극장 맞은편에는 친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제일목욕탕이 자릴 잡고 있었다. 까치에게 까치밥을 남겨놓듯이 국제극장은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극장의 문들을 모두 활짝 열어 놓았다. 그래서 들어가서 본 영화도 부지기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羅生門)`도 그때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 번`, 임권택 감독의 `증언`, `짝코`도 시차를 두고 본 걸로 기억한다. 영화 간판을 보면서 약간 불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새로운 감성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인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를 숨죽이며 본 기억이 난다. 정말 기억에 남는 건 홍콩영화였다. 홍콩 여배우 진추하의 영화 `사랑의 스잔나`와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One Summer Night`은 늘 `내 사랑 내 곁에`였다. 누나가 우리말로 적어준 이 노래가사를 동생과 함께 외워서 흥얼거리곤 했다. 오후 상영이 끝나고 밤 상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극장에서 틀어주던 다양한 음악들이 죽도동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가을밤에 울려 퍼지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와 `The Sound of Silence`는 어린 내게도 느낌이 팍팍 왔다. 또 이 무렵에는 리사이틀이란 이름으로 유명 가수들이 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김희갑, 김추자, 하춘화, 박상규 등 유명가수들이 국제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한 걸로 기억한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고 회자되던 김추자는 무대에서 신중현이 작사·작곡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늦기 전에`,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를 자주 불렀다. 김추자가 배꼽이 다 드러난 짧고 딱 달라붙는 티셔츠에다 꽉 끼는 나팔바지를 펄럭이며, 손을 비비꼬아서 내뻗고 고개와 허릴 비틀며 긴 파마머릴 휘날릴라 치면, 남녀노소 모두가 숨이 콱 막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박노식도 마도로스 복장으로 백구두를 신고 무대에 올랐던 것 같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건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이다. 서울로 유학을 가선 고모집 근처의 신영극장과 도원극장을 자주 들락거렸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을 가서도 마린스키 극장에서 수많은 오페라와 키로프 발레단의 발레 공연을 보았고, 볼쇼이 드라마 극장에서 상연하는 체호프의 4대 희곡을 보러 다녔다. 그래선지 김삼일 자유소극장과의 인연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지난 15일 끝난 체호프의 `결혼신청`공연은 10월부터는 단체주문을 받아 공연을 계속한다고 한다.
33년 만에 풀어놓는 고향 이야기가 극장의 추억과 제대로 겹쳐진다. `지역과 함께 세계로`를 표방하는 포항대학교에서 전체 교양과목으로 `영화로 읽는 현대사회와 인간`, `예술을 통한 자기경영`을 강의하는 것도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일이다. 유년시절부터 늘 함께 했던 극장이라는 공간이 제공했던 모든 것을 죄다 강의에 쏟아낼 작정이다. 한편 학교에서는 학교 건물의 외벽에다 광화문 교보빌딩처럼 시를 걸고, 그림도 걸고자 계획하고 있다. 학교 정문 옆의 꽃밭엔 꽃을 소재로 한 시를 걸어서 지역민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그 일에 관여하면서 극장에서 체득한 감성을 제대로 발휘해 볼 요량이다.
포항의 구도심에는 국제극장과 같은 `고향 이야기`가 배어있는 `추억의 공간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간들을 잘 활용해서, 청주의 수암골 벽화마을이나 육거리 종합시장처럼 `인문 공간`으로, `문화·예술 공간`으로, `시니어들의 교제 공간`으로, `추억의 영화 상영 공간`으로 만드는 방안을 포항시에서 적극 고려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