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나의 유령이 극장가를 지배하고 있다. 계급투쟁이란 유령이다.”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엘리시움` 등의 영화들이`전(全) 지구의 보편적 현상인 계급갈등과 투쟁`이라는 거대담론을 상업영화의 주된 소재로 다루면서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19세기말 이후에, 특히 선진국에서는 마르크스의 예상과는 달리 계급투쟁을 매개로 한 혁명은 그 힘을 잃고 시스템 내부에 흡수되어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양극화, 빈곤화대신에 새로운 중간층의 증대와 생활의 향상 평준화, 복지정책 확대로 인해 계급투쟁이 추동력을 잃어버린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구촌 사람들이 경제적 양극화와 금융자본주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결과란 말인가?
`인류 생존에 대한 우화-설국열차`에서 질주하는 열차는 하나의 유폐된 세상이자 인류 그 자체이며, 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은 계급의 상징이고, 꼬리 칸의 사람들이 머리 칸으로 한 칸 한 칸 나아가는 것은 계급투쟁의 실천이자 혁명의 과정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 칸까지 점유한 혁명가들이 인간의 본능과 욕망 그리고 이기심을 다루는 시스템을 어떻게 재설계하고,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을 아직까지도 찾고 있다는 데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온몸으로 관통했던 톨스토이는 계급투쟁을 통한 권력의 교체, 사회시스템의 재배열과 재배치로는 `인류 생존에 대한 우화`를 완성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회 사상가였다. 그는 1차 러시아 혁명을 몸소 겪으면서 2차 러시아 혁명과 혁명가들의 본성을 예견한 예언자이기도 했다.
레닌이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라고까지 말했던 톨스토이는 사실 레닌에게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지주`였다. `혁명의 거울로서 톨스토이`는 제정러시아 지배 하에서 신음하는 농촌의 현실과 어쩔 수없이 삶을 이어가는 농민들의 고통을, 병역 의무와 토지·조세 문제 등과 결부시켜 진술하면서 황제와 그 정부를 비판했다. 한편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지주로서 톨스토이`는 마르크스 예언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지속적인 폭정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자본가들이 사회를 지배하지만, 미래에는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이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사회주의, 국가, 기독교도`에서 혁명·혁명가들에 의해서는 사회 시스템의 부분적인 변화 혹은 권력의 재배열, 재배치가 일어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단 하나의 영구적 혁명이 있을 뿐이다. 바로 도덕적 혁명, 영혼의 갱생이다”라는 테제를 자신의 저작들에서 반복하고, 변주한다.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벽을 넘는 모습을 보고 세계의 장벽을 낫과 망치로 허물며 혁명을 완수하고자 전진하는 커티스의 형상과 겹쳐 읽을 수 있고 비폭력과 평화적 봉기로 서로 연대하면서 영혼의 혁명을 이끌어가는 톨스토이의 형상과도 겹쳐 읽을 수 있다. 아니면 시스템에서의 탈주를 감행하며 신인류의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주려는 이의 형상도 떠올려 볼 수 있다. 열차의 머리 칸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커티스와 열차 바깥의 변화의 징후들을 면밀히 파악하는 남궁민수는 우리의 두 얼굴이다. 설국열차의 계급제도를 만든 윌퍼드가 설파하는 사회시스템 유지 논리와 시스템의 유혹(후계자 언질)에 크게 동요하는 커티스도 우리의 모습이고, 시스템 밖으로 늘 시선을 던지며 “나는 벽이라고 생각했던 저 문을 깰 거야”라고 말하면서 신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는 남궁민수도 우리의 모습이다.
세상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선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관념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할까?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시스템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할까? 아니면 시스템과 관념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야만 할까? 러시아 혁명의 결과를 예견한 `톨스토이의 현대성`이 21세기 지구촌 사회가 간절히 요구하는 `전(全) 지구적 연대의식`과 `지구촌 인간의 역동적 맥락화`와 결부될 때, 세상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 탄력을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