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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백성이 행복한 나라로

등록일 2013-07-19 00:17 게재일 2013-07-1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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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종현 편집부국장

조선 왕조는 권력 다툼으로 500년을 보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이 권력 다툼은 왕권이 그 중심에 있었고 이 과정에 피를 나눈 부자지간, 형제간 등 천륜(天倫)을 파괴하는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가세한 것은 외척들이나 유력 가문들이 권력에 편승하기 위해 편을 가르는 등 권모술수가 넘쳤다.

어찌보면 오늘의, 아니 해방 이후 현재까지 우리나라 정국이 조선시대와 다를 바 없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이 속에서도 조선 왕조나 당시 권력층은 공히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기조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정치권도`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밝히는 등 참 묘한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삶의 질이나 `행복체감지수`는 기대치 이하라는데 무게가 실린다. 돌이켜보건대 `백성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한 역사적 인물은 조선왕조 때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권력 다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씨왕조 권력 잔혹사의 대표적 사례다. 여기에서 우리는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비정함을 확인할 수 있다.

소현세자는 13살에 차기 왕위를 계승할 세자(世子)에 책봉됐다. 하지만 그는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동생 봉림대군(훗날 효종)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중국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이후 9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역할을 했다.

그는 청(淸)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는 등 정치력을 발휘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에 있어 인조가 아닌 그와 해결하려 했다. 이로인해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눠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더욱이 그는 이 같은 외교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그는 서양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과 친교를 맺고 지냈다. 특히 그는 심양에 있는 동안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면서 선진문물을 체험했다. 그런데 이 학습이 그의 명(命)을 재촉하는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당시 인조와 그를 따르는 정치세력들은 소현의 이 같은 활동을 친청(親淸)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 세력들이 충돌하고 있었고, 인조 역시 삼전도 굴욕에 대한 청의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9년간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소현은 청에서는 배운 서양문화를 인조에게 소개하면서 `백성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삼전도 치욕을 씻어주는 정책이 아닌 철저한 친청주의가가 되었다고 판단하면서 그를 멀리하기 까지 했다.

그런데 소현은 환국 2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온몸이 새까맣게 변하는 등 독살시비가 있었지만 조정과 소현의 부인인 강빈은 혼란을 막기위해 사인(死因)을 덮는 정치력을 발휘해 일단락시켰다. 그 때 그의 나이는 혈기 왕성한 34세다.

한편으로 봤을 때 소현이 인조로부터 왕위를 계승해 권좌에 올라 자신이 구상한 개혁정책을 폈다면 조선은 물론 오늘의 우리나라가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소현 구상은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청과 맞을 수 있는 대안으로서양문물 도입뿐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세웠을 것이다.

작금의 정치상황을 보면 가관이다.

정치권은 국민에게 행복을 주기는 커녕 혼란과 갈등으로 몰고가고 있다. 막말보다 더한 저주성 발언, 패거리 정치 등 하는 짓거리는 신물날 정도로 역겹다. 368년 전 소현은 분명히 `백성이 행복한 나라`를 꿈궜다. 일국의 왕자가 인질로 잡혀간 타국에서도 위민정치를 구상했는데, 현재 정치권은 행복이 아닌 실망을 주는 일로 일삼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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