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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서 무명으로

등록일 2013-06-26 00:01 게재일 2013-06-2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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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찬<br /><br />김천대 임상병리학과 교수
▲ 김동찬 김천대 임상병리학과 교수

1984년 장안에 화제를 몰고 왔던 TV 드라마 `암행어사`를 기억하는가? 인기탤런트 이정길씨가 `암행어사` 역할을,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조연 임현식씨가 포교`갑봉이` 역할을 맡았었다. 당시 `암행어사`는 매회 하나의 완결된 에피소드로 이뤄진 단막극 형태였는데 18년이 지나 2002년 새롭게 리메이크 됐던 `어사 박문수`에 비해 극적인 요소, 허구를 많이 섞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암행어사(暗行御史)란 직책은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임금의 명령을 받고 지방행정관의 비리와 민심 및 백성의 생활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되던 직책이다. 암행어사는 왕의 명령을 직접 집행하므로 관리의 파면 및 직무의 정지,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의 재판, 백성의 고통과 청원의 처리 등 모든 문제를 현지에서 즉결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됐으며 그 결과를 서면으로 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암행어사의 파견에 대한 반대 의견이 워낙 강해 선조 대까지는 별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왜란과 호란으로 정치의 기강이 흐트러짐에 따라 인조 임금 이후 암행어사의 파견이 다시금 빈번히 이뤄지면서 상설 제도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끝없는 정치적 당파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암행어사 역시 자기가 속해 있는 당파나 인연이 있는 가문의 관리를 두둔하는 등 문제점을 발생시켰으며, 하급관리들의 부분적인 비행만을 들춰내는 데 그쳐 근본적인 행정개혁이나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쉽게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왕의 직속 비밀 정보 기관인 암행어사도 초기 순수성을 잃게 된 것이다.

예전의 암행어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요즘의 기관을 예로 들자면 지금의 국정원(국가정보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정원과 유사한 각국의 정보기관들로서 이스라엘은 모사드(Mossad), 중국은 국가안전부(MSS), 독일은 연방정보부(BND), 러시아는 예전의 KGB보다 더욱 규모와 권력이 강해진 해외정보국(SVR), 영국은 MI6 등이 있다. 미국은 CIA뿐만 아니라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DHS)란 국가 기관이 있다. DHS는 테러로 인한 공격과 자연 재해로부터 미국 국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02년 11월에 설치된 미국 연방 정부의 중앙 행정 기관이다. 국정원의 역사를 한국 정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1년부터 1998년까지 국정원을 중앙정보부, 그리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라고 불렀는데 당시의 원훈(院訓)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국정원 원훈은 “정보는 국력이다”였으며, 2008년부터 현재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다.

그런데 음지에서 일하고 무명의 헌신을 해야 할 국정원이 요즘 신문과 뉴스에 연일 언급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늪에서 국정원이 슬기롭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국정원이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이틀전, 국정원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관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해 버렸다. 남재준 신임 원장 체제의 국정원은 우선 대북ㆍ대외 정보 수집이라는 본연의 업무를 바로세우기 위한 조직 진단부터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이번에 국정원측의 NLL 회의록 공개는 더 이상 국정원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양지로 불러들이지 말아 달라는 까칠한 부탁으로 해석된다. 국정원 본래의 위치인 음지에서 조용히 일 할 수 있도록 제발 가만히 놔둬달라는 강한 메시지를 보낸것이다.

국가기관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정치적 이유로 자꾸 훼손시킨다면, 그 국가기관의 기능은 결국 마비될 수밖에 없다. 어찌보면 우리는 지금, 국정원 못지않은 정보력을 지닌 네티즌들이 즐비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정보가 무분별하게 개방된 시대 속에서 국정원에게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기 이전에 정치인들이 먼저 국정원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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