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철강공단이 요즘 너무 조용하다. 아니 적막감이 흐른다는 표현이 딱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장들이 가동되고 있고, 도로에는 철강제품을 실은 화물차량들이 분주하게 오가는데도 왜 이처럼 조용하게 느껴질까.
포항철강공단은 270여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2만여명의 근로자들이 일하는 삶의 터전이다. 포항 경제권의 중심이자 한국 철강산업의 메카다. 하지만 이곳에도 글로벌 불황의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하더라도 활기가 넘치던 곳이다. 지난 IMF외환위기 때에도 다른 곳에서는 다 죽는다고 아우성쳐도 포항만큼은 예외였다. 오히려 울산과 더불어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업체마다 생존전략을 짜놓고 아침부터 시작된 임원단 비상대책회의는 하루 종일 이어진다. 생산한 제품이 팔리지 않으니 재고량이 쌓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근로자들을 놀릴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죽을 맛이다. 구조조정 얘기는 아직 꺼내지도 못한다. 사장을 비롯한 임원 모두가 축 처져 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생존문제를 하나같이 화두로 꺼낸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큰일 날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공단내 J업체 이모 상무를 만났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잘 나가던 제품이 지난해 초부터 판매량이 서서히 줄더니 올들어서는 아예 멈췄다는 것. 제품이 팔리지 않으니 재고량이 쌓일 수밖에. 덩달아 사장 이하 임원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매일 아침 비상회의다. 급기야 관리담당인 이 상무도 영업직으로 임시 발령을 받아 전국을 누볐다. 그는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제품이 안 팔리니 사장 대하기가 두렵다”고 했다.
또 다른 H사 윤모 이사도 요즘 바늘방석이다. 건설과 조선경기가 좋을 때 그렇게 잘 팔리던 제품이 지난해 초부터 판매량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재고량이다. 공장안팎에 쌓인 재고품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렇다고 생산라인을 멈출 수도 없다. 그는 요즘 근로자 배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호황 때 벌어놓은 돈을 까먹는 형국이다. 지금 당장 생산라인 일부를 멈추고 구조조정을 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털어놨다.
자금사정이 좋은 대기업들이야 어떡하든 이 위기를 버텨내겠지만 자금력이 약한 중소기업은 사실상 존폐기로에 서 있다. 지금 당장 회사문을 닫고 싶은 생각이 꿀떡같을 것이다. 특히 조선과 맞물려 있는 후판관련 업체 사장들의 고민은 더욱 깊다. 업종전환이나 대체 사업을 물색해보지만 여의치 않다. 조선경기가 1~2년내 살아나지 않으면 상당수 업체가 도산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얘기를 지난 1997년말 IMF 외환위기 때로 잠시 돌려보자. 당시 포항철강공단내 대다수 업체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자동차 부품생산업체인 S업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존폐기로에 선 이 회사 사장은 고민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명퇴 등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다. 노조가 거세게 반발했으나 끈질기게 그 위기를 버텨냈다. 이 회사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IMF외환위기 3~4년후로 기억된다. 자동차경기가 살아나면서 이 회사도 덩달아 특수를 맞았다. 불과 4~5년만에 회사는 정상화됐고, 수백억이 넘는 흑자를 냈다. 그 때 사장의 결단이 없었다면 회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조업을 하는 사장은 모두가 애국자다. 요즘 같은 이런 불황에 사장들의 고통을 누가 헤아려 주겠느냐”고 토로하던 그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불황의 긴 터널을 잘 견뎌내야 한다. 지금 비록 앞이 안보이고 캄캄하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는 법. 지금이 터널안이고 내리막이라고 생각하자, 언젠가는 터널 밖 정상에 설 날이 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