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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등록일 2013-01-25 00:01 게재일 2013-01-2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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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현 편집국 부국장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저 치열했던 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40대 중반의 이맛살을 팽팽하게 하는 이 명문에는 26살 복학생 운동권, 청년 유시민의 성성한 이성과 풋풋한 정의감, 비장한 역사의식이 콸콸 흐르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유화 국면을 조성한 1985년, 운동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할 목적으로 소위`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이에 엮여 징역 1년6월의 1심형을 선고받은 그가 손수 작성한 항소이유서는 소설가 누이 유시춘에 의해 신문기자에게 전달돼 큰 반향을 일으킨다. 열혈 청년은 장문의 끝을 짜르 말 러시아의 시인 네크라소프의 시에서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대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를 인용하며 맺는다.

힘 없는 이웃에 대한 슬픔과 오만한 권력의 횡포에 대한 분노는 지극히 당연한 인지상정이며 그래서 붉은 머리띠와 함께 운동권과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자 품성의 한 상징이었다. 하지만 동유럽의 몰락과 한국의 민주화로 `적`이 애매해진 국면에서 급기야 `슬픔과 노여움 없이`운동하자는 자성이 나오기까지 했다.

허나 역사발전의 나선형 원리는 어김 없이 작동했다. 지난 20여년간 확대된 민주화의 공간에서 과거형의 노골적인 정경 유착은 한층 더 세련되게 탈바꿈한 채 글로벌 경제 위기감과 IT강국의 자부심이 대기업의 활약에 대한 대견함으로 연결되면서 자본이 권력을 추월하는 양상마저 연출되고 있다. 비정규직과 하우스에 워킹 까지 갖가지 푸어(poor)의 실상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분노의 기제가 사회문제의 해결에 유효한 열쇠임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세계는 아직 테러와 학살, 종교적 맹목, 백주 대낮의 윤간과 아동학대와 인신매매가 난무하며 그 뉴스를 접하는 우리는 절망과 분노에 몸서리치고 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3.8선 이북에선 항일 빨치산 투쟁의 노정, 일군(日軍)에 추격당하는 절체절명의 강물 속에서 대오를 위해 무기 대신 등에 업은 젖먹이를 떠내려보냈다고 자부해온 혁명투사의 손자손녀뻘 인민들이 조·중(朝中) 국경의 얼어붙은 강어귀 어디선가 기아와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슬픔과 노여움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불의와 비겁이 아무리 판치더라도 격한 감정을 당연시 한 채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평범한 생활의 발견으로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여야로 나뉘든, 진보와 보수로 나뉘든, 평등이나 경쟁의 어느 한 쪽에 서든,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어떤 진영에 서서 분투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야만의 상태로 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다함께 평화를 누리고 화해와 관용이라는 한 단계 고양된 감정을 제도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최근 대선 결과를 추수하는 과정에서 편협한 진영 논리에 반성과 `오로지 한명만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는 어느 대선 후보의 `똘마니 근성`에 대한 비판은 합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민주와 비민주의 경계가 상당히 옅어진 지금의 한국에서 개발독재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주홍글씨를 낙인하는 무분별한 분노에 대해 유권자들은 등을 돌린 것이다.

오는 2월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대한민국은 그동안 변모한 국격 속에서 역사적 대립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 구체적 정책으로 구현되는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다. 차기 권력이 이를 시대정신으로 제시한 만큼 약속 이행에 미적거린다면 여론의 비판이 쏟아질 것이다. 특히 웰빙으로도 안 돼 힐링, 즉 치유를 해야 할 만큼 심신의 피로가 깊어진 한국에서 정치가 더 이상 국민의 슬픔과 노여움을 위로하도록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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