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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담의 효용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2-12-18 00:12 게재일 2012-12-1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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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도 아린 피멍을 느낄까. 왜 덤덤하기만 한 저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까. 왜 노래하는 저 파도가 내겐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칠까. 세상사 맘먹기 달렸다고? 그러니 뭐든지 담대하게 툭 털어버리라고? 그런 건 무책임한 말을 뱉고도 좋은 말을 했다는 뿌듯함을 얻고 싶은 자의 립 서비스일 뿐, 실제 소심하고 예민한 소시민인 우리는 그런 충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이 제일 힘겹고, 내가 당한 일들이 가장 분노할만하다고 단정 짓는다. 자학하거나 피해를 자청함으로서 자기위안을 얻으려한다. 우리 일상은 두루마리 휴지 풀리듯 술술 풀리는 게 아니다. 실크 블라우스에 붙은 껌 딱지를 떼 내는 것처럼 성가시고 힘들 때가 더 잦다. 이미 이어온 날들은 불만족스럽기만 하고, 앞으로 이을 날들 역시 두렵기만 하다. 산다는 것 자체가 망설임과 회한의 기록들이다.

이런 이야기가 기억난다. 부모를 여읜 청년이 돈 벌러 서울로 떠나기로 한다. 앞일이 걱정스러운 청년은 이장에게 덕담을 부탁한다. 서예에 능한 이장이 써준 말은 `두려워하지 마라` 였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비결은 두 마디면 충분한데 나머지 한 마디는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청년은 성공했지만 그건 자신의 참모습은 아니었다. 30년 전 그 이장을 다시 찾았다. 세상 뜬 이장이 남긴 나머지 덕담은 `후회하지 마라` 였다.

두려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이 두 마디만 새겨도 덜 피곤한 삶이 펼쳐진단다. 하지만 여린 바람에도 잿빛 피멍을 느끼고, 무던한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발랄한 파도가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치는 날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 짧은 두 마디는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일 뿐이다. 두려워 망설이고, 건너고선 후회하는 게 인생의 강물 아니던가. 그래도 삶이란 동네엔 이장의 저런 덕담이 필요한 거다. 상처 많은 인간을 위한 덕담의 효용은 실천에 있는 게 아니라 위무에 있으니까.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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