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설교는 가난한 자들에게 행한 연설이다. 성경의 이 부분을 읽고서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가 `부자에게 꾸중했구나`하고 대리 만족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자에게만 꾸중을 한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에게도 해당된다. 어쩌면 생계를 위해서는 오히려 가난한자가 돈의 유혹을 더 느낄 수도 있다.
어느 농막 집에 `무소유`라고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 마당에는 건축 자재 등 여러 버려진 철물 등 폐기물들을 많이 모아두었다. 값이 헐한 것만 모아둬서 무소유인 것 같지만, 그는 유소유로 가득 채웠다. 그는 잡동사니 고물들을 모은 부자인 것이다. 단지 그는 현재 돈을 적게 가진 것뿐이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기 쉽다. 신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더 나은 생을 위한다면 돈과 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새는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양측 모두에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전에서는 하느님을 잠시 생각하지만, 일상평일에는 모두 돈을 생각한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돈은 단순히 그냥 돈이 아니고, 화·불화를 일으키는 영적인 세력이다. 섬김의 대상이다. 단순한 돈이 아니고, 신적인 존재이다. 재물을 말할 때, 돈을 인격화시킨 말인 `맘몬`이라는 것이 된다. 인간은 돈을 신과 견줄 수 있게 높이 받든다. 재물이라는 신이다. 인간은 돈의 힘에 너무 약해 쉽게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만다. 양심과 믿음과 정의를 팔아 버린다. 돈을 전능한 존재로 믿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단다. 이것이 일반 인간의 생각이다. 우리는 돈이 내 삶을 보장한다고 믿는다. 돈을 은행에 저축하거나, 빌딩을 사거나, 주식 투자 등을 해 둔다. `그 돈이 미래를 보장하겠지`하면서 우리는 돈에 눈이 멀어버린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면 우리의 영적 생활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보물 같은 돈에 마음이 가 버리기 때문이다. 돈이 나의 지배자가 되고, 신의 왕좌 자리에 돈을 모시게 된다. 돈이 있으면 신(하느님)께 기댈 일이 거의 없어진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돈 많으면 병을 앓을 때,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세계에서 제일 좋은 병원에 갈수 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었지만, 결국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리고 만다.
북한의 성경에는 전도서에 `돈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우리 남한의 성경에는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고 쓰여 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만족할까? 아무리 많아도 만족은 없다. 그 끝을 모른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단다. 여기에서 불행이 싹 튼다. 그러나 인간은 돈이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의 소유뿐이다. 생의 가치와 행복과는 무관하다. 재물이 삶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눈요기 정도일 뿐이고, 자기 무덤이나 잘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는 세종류가 있다. 평생 돈을 모으다가 죽는 자, 평생 돈을 꼭 붙들고만 있다가 죽는 자, 돈을 다 날려 버리고 죽는 자 등이 있다. 누구에게도 선하게 누리도록 허락지 않는다. 돈을 객관적 입장에 두기는 참으로 어렵다. 스스로 노력하고, 마음수련을 해야 조금 멀리 띄어 놓을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