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10·26이 터진 지 33년째 되는 날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이 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弑害)된 날이다. 40대 이하 젊은 층들에게는 이 날이 우리 역사의 비극 정도로 여겨지겠지만 50대 이상은 유신시대의 교육, 문화, 정치 등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기에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아버지인 박정희는 청와대 궁정동 안가에서 핵심 참모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과 함께 주연을 했다. 시국 관련 내용이 주요 화제가 됐고, 그 책임을 두고 차지철이 김재규를 탓하자 김재규는 이에 격분, 박정희를 권총으로 시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총에 차지철도 절명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어수선한 정국은 `장기 집권`을 한 박정희에 대한 재야나 대학가의 반발로 인한 것이었다. 그렇다해도 민주주의 국가최고 권력층 내부에서 `총질`이 나온 것은 근대사에서 처음있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용인술(用人術)로 상호 견제 및 경쟁을 택했다. 문제는 그가 택한 용인술로 등용된 이들이 충돌을 일으켰고, 그 결과 자신이 희생이 됐다. 이 때문에 자녀들은 어머니였던 육영수 여사에 이어 아버지까지 `총`에 맞아 운명하는 `비운의 가족`이 돼버린 것이다.
이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국민의 앞에 서 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정치, 경제, 통치 등에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는 우리나라 `경제부흥`을 주도했던 통치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33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박정희 정권 때의 `잔재`가 맏딸을 연일 괴롭히는 혼령이 되어 대선 승패를 좌우할 `뜨거운 감자`가 돼버렸다. 정수장학회, 인혁당 사건, 영남대 재단 인수 등 박정희의 유산이 온 매체를 도배하고 있어 부관참시(剖棺斬屍)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특히 야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정치공세를 펴고 있어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이번 대선이 `야당`과 `죽은 박정희`간의 대결로 착각할 정도다. 어찌보면 이 문제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도 현재 대선 열기로 뜨겁다. 오마바나 롬니는 미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을 가지고 승부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선은 국가발전을 위한 희망적 요소는 `실종`되고, 국민 정서를 혼동하게 하는 포퓰리즘을 대선`필승 무기`로 선택하는 치졸함을 보이고 있다.
자식과 부모 간에는 `천륜(天倫)`이라는 끈이 있다. 야권과 진보세력이 박정희를 `독재자다`,`친일파다`,`좌익활동했다` 는 등으로 아무리 난도질해도 박 후보에게 박정희는 영원히 그녀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하기야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랬다. 대선 후보 당시 장인의 좌익활동을 두고 공격을 받을 때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라고 했다. 이 발언은 박 후보 입장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가정사로 봤을 때 박 후보의 어머니가 죽지 않고 생존했다면 그녀도 단란한 가정을 꾸렸을 것이다. 만약 아버지인 박정희가 살았다면 그녀가 정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양친 유고로 그녀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다. 1988년 정치 입문 이래 진흙 투성이인 정치판에서 24년이란 세월을 보내야만 했고, 남성이 주류인 한국 정치판 속에 가장 성공한 여성 정치지도자로 변신했다.
오는 12월19일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박정희의 유산(遺産)을 어떤 식으로든 정면으로 물려받아 할 처지에 놓여있다. 비록 그것이 유신헌법과 인혁당사건 등으로 대별되는 `독재정권`이란 부정적 유산이 될지, 새마을운동과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이 나라의 경제부흥을 일구어 낸 대통령이란 긍정적 유산이 될 지는 아직 알수 없지만 말이다. 과연 박 후보는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어떤 유산을 더 많이 물려받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