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어떤 사람은 부자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나며,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실패한다. 어떤 사람은 수명 장수하는데, 어떤 사람은 20살도 못 넘기고 단명하며, 어떤 사람은 미인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박색으로 태어나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 원인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우리의 조상들은 사주팔자나 조상 탓(잘되면 제 탓, 잘 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렸으며, 생물학자들은 한낱 우연으로 돌렸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모순 부조리로 돌렸으며, 불교에서는 업보(業報)로 설명하고 있다.
업이란 카르마(Krama)란 범어를 의역한 것인데, 원어를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행위(행동), 습관력, 버릇, 남아 처진 힘(殘在力), 꾸며내는 힘(構成力) 등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업은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다. 즉 몸으로 살생(殺生)하고, 도둑질(偸盜)하고, 삿된 음행(邪淫)을 하고, 입으로 거짓말(妄言)하고, 두말(兩舌)하고, 욕지거리(惡口), 꾸밈말(綺語)을 하고, 뜻으로 욕심(貪慾)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짓(愚痴)을 일삼고 있다. 이를 10악업(十惡業)이라고 하며, 그 반대로 몸으로 살려주고(放生), 부지런히 힘쓰고(勤勉), 바른 행동을 하고, 입으로 바른 말(正語), 진실된 말(眞語), 사랑스런 말(愛語), 실다운 말(實語)을 하고, 뜻으로 베풀어 주고(布施), 자비로 대하고(慈悲), 슬기롭게 행하는 것(智慧)을 십선업(十善業)이라고 한다.
업을 분석해 보면 첫째 선악의 의사, 둘째 의사 뒤에 일어나는 실제 행위(행동), 셋째 의사와 행동의 습관적 잠재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악의 의사란 행위의 동기 목적을 말한다. 어떠한 행위도 그것이 책임있는 행위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사를 동반해야 한다. 예컨대 살인할 의사와 목적이 없이 잘못해 사람을 죽였다든가 자기의 자유의사가 아니고 강요된 행위로 인해 살인했을 경우에는 완전한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실제 행동이란, 선악의 의사에 의해 실제로 신체와 언어로서 행해진 선악의 행동을 말한다. 선악의 의사만 있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거나 실제 행동이 실패해 미수로 끝나면 그것은 행위가 완성됐다고 할 수 없다.
습관적 잠재력이란, 자기가 지은 업이 그대로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그때마다) 습관력이 돼 그 사람에게 남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도둑질을 한 경우에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이나 주위에 대한 두려움, 익숙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두 번 성공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양심이 마비되고, 대담해지며 도둑질을 하는 방법도 향상되고, 그것이 습관화되면 무의식적으로 도둑질을 하게 된다. 이것은 악사뿐만 아니라 선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업보설이란 선한 업(業報)에는 반드시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업(業報)에는 반드시 나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금생에 받은 것이 그것이다) /욕지래생사(欲知來生事: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금생에 짓는 그대로이다)”<法華經에서> 전생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은 것을 보면 전생의 나를 알 수 있고, 내생의 내 모습을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자작자수(自作自受)의 설이며, 자기의 의사에 의해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갈 수 있다는 자율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