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각이나 물질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관점을 오랫동안 가지면 소신으로 변한다. 소신은 시간이 흘러가면 점점 익어가서 신념이 된다.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는 긴 세월 경험을 축적해 왔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저렇게 설명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 편으로 쏠려 있는 경우도 있지만, 어떨 때는 양 측의 숫자가 거의 엇비슷하기도 한다. 지동설의 초기와 같이 소수만이 진리의 편에 서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일 큰 대립은 대통령 선거 때, 불과 몇 표의 차이로 한 쪽이 승리를 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1954년 자유당 시절에는 국회에서 4사5입(四捨五入) 원칙을 만들어서 헌법을 통과 시켰다. 당시의 여당 국회의원 중 단 2명만 4사5입 가결 방법을 반대했다고 한다. 뚱딴지같은 통과였다.
삶의 원칙에 대해 고심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갈고닦은 생각이 밑받침돼 형성된 신념을 가질 수 있다. 만일 그 신념에서 누구나 좋아하는 향기가 나거나 아름다움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동의를 받는 공감대가 만들어져서 확산될 수 있다. 그것은 따뜻함과 정의를 대변하여 확산되면, 사상의 주의(主義)로 만들어 진다.
신념은 각자의 사고의 산물이기 때문에 같은 목표를 두고도 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누구는 자유 민주주의를 택하고, 어떤 이는 사회주의를 택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지금 복지 정책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더 빨리 진행해야 한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신념은 각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 뿌리는 더욱 확실하게 사회에 적용된다.
다양한 인간의 소신은 한 가지로 통일될 수 없다. 통일된 신념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 외압이 강하게 작용했을 때 가능하다. 신념의 단일화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여 신의 경지에 가야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기야 수십 년 후에 인간 두뇌 정도의 영특한 스마트폰을 가질 것이라고 하니, 미래를 기다려 보자. 그러나 그때에도 인간의 주장과 학설이 여러 가지로 난무할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지능 수준 정도로는, 인간은 아마도 영구히 단일화해 통일된 이론이나 신념은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주장들이 단일한 결론이 만들어져서 기타의 것이 잔잔한 미소 속에 철회될 때까지, 여러 학설들이 심심해서 잠들 때까지, 각각의 입장들이 시들어 버릴 때까지, 인간들은 자기 것을 주장하고,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또는 입장을 설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장과 연구는 선한 결과를 낳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상(理想)적인 생각을 하여 만든 이데아는, 지향하다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전쟁에서 죽였다. 종교마저 사랑을 빙자하여 세계적인 살육을 행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소신에 대한 여러 잣대들이 우후죽순과 같이 푸르게 인간을 유혹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곳으로, 어떤 이는 저곳으로 기웃거리게 된다. 그러기에 자기의 주장이 종국에는 꼭히 선(善)쪽에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각자는 우선 지금 여기서 상대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인간은 전체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나보다. 그것을 우리는 자기에게 설정된 환경이라 할 것이다. 다른 말로는 운명이라 한다. 생각을 결정지우는 환경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