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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차기 잔혹사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등록일 2012-08-07 21:32 게재일 2012-08-0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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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발행인

승부차기는 잔혹하다. 반면에 보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통쾌한 승리감을 느낄 수 있어 순간적 쾌감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올림픽 축구팀은 지난 5일 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 영국 웨일스 카디프 시티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7만 관중이 영국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가운데 열린 8강전에서 양 팀은 연장전을 합쳐 120분간의 혈투에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승부차기에 들어가 5-4로 이겼다. 영국 선수의 선축으로 시작된 승부차기에서 영국은 1~4번까지의 선수는 차례로 골을 성공시켰다. 한국 선수들도 구자철, 백성동, 황석호, 박종우가 골을 넣으며 장군 멍군을 불렀다.

7만 관중이 자국 선수가 골을 성공시킬 때마다 함성을 질렀지만 운명의 승부는 다섯 번째 키커에서 갈렸다. 영국 축구 전설이 된 첼시의 대니얼 스터리지의 슈팅이 우리 골키퍼 이범영의 선방에 막힌 반면 기성용의 발끝을 떠난 볼은 영국 골네트를 가른 것이다. 영국 팀은 1대1 경기를 역전시킬 패널티킥을 전반에도 얻었지만 키커로 나선 램지의 슈팅을 정성룡 골키퍼가 막았다. 이후 양 팀의 골문은 굳게 닫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실축을 하고난 뒤의 대니얼 슈터리지의 모습은 인생을 모두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 정도로 참담했다.

축구 선수들의 발끝을 떠난 볼이 10.97m가 떨어진 골라인에 도착하는 시간은 0.4~5초. 시속 120km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속도다. 골키퍼가 공을 보고 어느 한쪽으로 몸을 날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0.6초라 하니 이론적으로는 막을 수 없고, 순간적으로 골키퍼는 어느 한 쪽을 운명적으로 선택 할 수밖에 없다.

축구 역사를 보면 1960년대부터 승부차기가 양 팀의 승부를 가르는 수단으로 등장했다. 월드컵에서는 1982년에 처음 도입,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여러 번 승부차기가 나왔었다.

승부차기 잔혹사는 심리적 부담이 의외로 크다. 1969년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멕시코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다. 이날 호주와의 경기에서 대표 팀 임국찬 선수는 월드컵 진출 승부가 걸린 패널티 킥을 넣지 못했다. 어느 한 순간에 역적이 되다시피 한 이 선수는 결국 미국으로 가는 이민 길에 올라야 했다. 어린 선수가 잔디밭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축구전문가들은 승부차기 성공률을 대체적으로 77%로 보고 있다. 먼저 차는 쪽이 6%로 승률이 높은 반면 원정경기보다 홈경기 승률이 낮다. 그 의미는 응원전을 펴는 관중을 의식하는 심리적부담일 것이다.

축구는 세계적 인기 스포츠다. 지난 1967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지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3년을 끌었던 내전에서 200만 명이 학살당하거나 굶어 죽었던 시기에도 딱 사흘간 전쟁이 없었던 날이 있었다. 1969년 1월에 있었던 사흘간의 휴전이다. 나이지리아 축구 대표 팀과 친선경기를 갖기 위해 자국에 온 브라질 팀 펠레를 보기 위해서 사흘간 휴전이 발효됐으나 축구경기가 끝나고 다시 살육전이 전개됐다고 한다.

축구가 어느 새 우리나라에서도 국민 스포츠로 등장했다.

1954년 한국이 스위스 월드컵에 처음 출전 했을 즈음 1인당 국민소득은 70달러였다. 돈이 없어 대표 팀은 열흘쯤 합숙훈련을 하고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취리히 행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해 2진은 첫 경기가 열리던 전날 밤에야 가까스로 도착했다. 취리히 공항에서 만난 각국 기자들로부터 날짜나 알고 왔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선수단이 갖고 간 공식 경비가 200달러였으니 지금 억대 선수들의 연봉으로 치면 세상이 너무 많이 달라졌다. 그 시절 선배들의 눈물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4강 신화를 만들었으며,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의 4강 신화 등 오늘의 한국축구를 있게 한 출발점이 됐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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