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이 한 말을 밥먹듯이 바꾼다는 것을 가리켜 식언(食言)이라고 한다.
식언은 서경(書經)의 탕서(湯書)에 나오는 고사성어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의 폭정을 보다 못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기로 했다. 그는 영지인 박 땅에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그대들은 나 한 사람을 도와 하늘의 벌을 이루도록 하라. 공을 세운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니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朕不食言)”식언은 말(言)을 먹어버리는(食) 것이니, 말만 해놓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춘추좌씨전`에는 `식언이비(食言而肥)`란 고사성어가 나온다. 노나라 애공(哀公)은 맹무백이란 대신이 거짓말을 밥먹는 듯 하는 것을 알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맹무백이 축하연을 베푼 자리에서 몸이 비대한 곽중을 보고 모욕할 생각으로 묻는다. “곽중,뭘 먹고 그리 살이 쪘소?” 옆에서 듣고 있던 애공이 맹무백에게 창피를 주려고 이렇게 쏘아붙였다. “맹무백, 당신의 (거짓)말을 하도 자주 먹으니, 곽중이 어찌 살이 찌지 않을 수 있겠소.”
살다 보면 식언을 피할 수 없지만 가장 자주 하는 건 정치인들일게다. 실제로 거짓말 잘하는 직업을 묻는 한 여론조사에서 76%가 정치인을 꼽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정치 풍자 유머 가운데 정치인의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는 통렬하다. 정치인들을 태운 버스가 밭으로 굴러 떨어졌다. 밭을 갈던 농부는 부상당한 정치인까지 모두 땅에 묻었다. 경찰이 “생존자는 없었느냐”고 묻자 농부는 “몇몇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냥 묻어버렸다”고 했다. “왜 그랬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농부의 대답은 이랬다. “정치인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 아닌가요?”
비박(非朴)3인방으로 불리던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12일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경선에 뛰어들었다. 완전국민경선제 요구가 좌절됨에 따라 경선불참을 선언한 정몽준ㆍ이재오 의원과 달리 김 지사는 “새누리당의 재집권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바라는 많은 분들의 염원을 뿌리칠 수 없었다”며 경선 불출마 입장을 번복했다. 김 지사는 국민들앞에서 한 약속을 식언한 셈이다.
김 지사가 경선참여로 입장을 바꾼 데는 나름의 고심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지지도를 볼 때 이번 경선에서는 박 전 위원장과의 대결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될 정도지만 정면돌파를 택해야 2017년 차차기 대권후보로서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정치공학적 셈법도 작용했을 것이다. 경선 흥행부진을 염려한 박근혜 후보캠프측의 설득도 주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김 지사는 경선 참여를 선언한 직후부터 곧바로 자신의 식언(食言)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곤경에 빠졌다. 그는 그동안 “대선승리를 위해 완전국민경선제가 필요하며 경선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경선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왔다. 한마디로 상황은 전혀 바뀐 것이 없는데 `새누리당의 재집권과 많은 분들의 염원`을 이유로 입장을 180도 바꾼 것이다.
설득력도, 명분도 없는 이유로 식언한 김 지사가 여권내 별다른 세력도 없이 뛰어든 경선판에서 박 전 위원장을 상대로 무슨 활약을 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이미 정치권에서는 김 지사가 경선에서 김태호 의원이나 임 전 대통령실장 등과 빠듯한 2위 싸움을 할 것이란 전망마저 나온다.
비록 정치인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된 지 오래지만 그래도 국민들은 한번 내뱉은 말을 지킬 줄 아는 정치인을 좋아한다. 실제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선 후보가운데 40%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박 전 위원장이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며 지켜온 덕분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지는, 식언치 않는 태도가 한 몫 했을 것이다. 툭하면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게 식언의 정치판이다. 다소 마른 편인 김 지사가 `식언의 정치`를 시작한 게 못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