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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쌀 한 알 장일순

등록일 2012-04-27 21:51 게재일 2012-04-2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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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욱 시인·달전초 교사

6학년 국어 3단원은 토의 수업 시간이다. 모둠별로 토의 주제를 정하고 각자 역할을 나눠 맡았다. 일주일쯤 시간을 주니 대개 파워포인트를 만들어 와서 발표를 하는데 어느 모둠의 토의 주제가 `친구들이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였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요즘 아이들이 존경하는 인물은 위인전과 스타 사이에 존재한다. 뽑힌 위인으로는 세종대왕, 유관순, 장영실, 안중근, 이순신이 있었다. 현존하는 스타로는 축구선수 메시, 수영선수 박태환, 개그맨 유재석, 스케이터 김연아 등이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에 `없다!`가 뽑힌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존경하는 사람 없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존경(尊敬)이란 우러러 받들다는 뜻이다. 삶의 모델로 삼아 우러러 받들 사람이 한 사람쯤 없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막막할까? 더군다나 자라나는 이 아이들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에 `없다`가 뽑힌 것을 보니 마음이 참 헛헛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한 번 읽어보라고 지인이 준 것인데 별 기대 없이 책장을 넘겼다. `장일순이 누구지?` 하며 말이다. 그런데 그날 밤 오랜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중고등학교 때 밤새워가며 읽었던 헤세의 `데미안`과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신선한 충격을 줬다면 장일순의 사상과 생애가 담긴 `좁쌀 한 알 장일순`은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왔다. `왜 여태껏 이 분을 몰랐을까?`라는 후회와 부끄러움이 들 정도로. 장일순의 생애와 이력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책에 실린 그분의 말씀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지면은 모자랄 테니까.

어느 잡지사 기자가 장일순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째서 `조 한 알`이라는 그런 가벼운 호를 쓰십니까?” 장일순이 그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그시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하잘것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하면서 내 마음 추스르는 거지”

장일순은 강연할 때 질문을 많이 했다. `지도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단체장을 모아놓고 강연을 할 때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분이 누굽니까?” 어머니라는 대답이 나왔다. “어머니라고 하셨는데, 왜 그분이 고맙습니까? 밥을 해주시기 때문이지요. 똥오줌을 닦아주시기 때문이지요. 청소를 해주시기 때문이지요. 어머니라고 뻐기기 때문에 고마운 게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여러분은 각 단체의 대표입니다. 장입니다. 그러나 거기 앉아 대접받으라고 장이 아니에요. 거기서 어머니 노릇을 하라는 장입니다. 아셨어요?”

외국의 한 기자가 장일순을 찾아와 물었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일순이 말했다.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기자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 혁명도 다 있습니까?”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돼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

장일순은 드라마 작가 홍승연에게 글씨를 써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 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상원사란 절이 있어 거기에 들렀는데, 대웅전 안의 불상을 향해 장일순과 지학순이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했다. 지학순은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고, 장일순은 평신도다.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천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상을 보고 절을 해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성인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어찌 우리 같은 소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일순은 1994년 “내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우주로 돌아갔다. 장일순의 장례 미사가 거행됐던 원주시의 봉산동 천주교회는 3천의 조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 장일순을 존경하고 기리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세상을 밝히고 있다. 존경하고 따를만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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