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3월11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성철 스님(1912~1993)이 가야산에서 일으킨 선풍은 지금도 유명하다. 성철 큰 스님은 돈오점수가 우세했던 종래 대승불교의 선풍과는 달리 `단번에 깨친다`는 뜻의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지향한 선승(禪僧)이셨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기 마음을 꺼내 오기까지 밑바닥에서부터 피 땀을 흘리면 내공을 쌓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 큰 깨달음을 세상에 내놓으신 분이시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번뇌 망상을 떨쳐내지 못했다면 깨달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일갈했다. 그 한마디로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었다.
1936년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한 성철 스님은 승복을 입은 30년간 산문(山門)을 나서는 것을 꺼렸다. 눕지 않고 8년을 수행(長坐不臥)하는 옛 선사들의 수행방법을 고집스럽게 쫓았다.
스님은 여러 차례의 바느질로 누더기가가 된 겉옷을 걸치고 “나는 못났다”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으며 “나는 장(늘)이 누비장삼을 걸친다”고 하셨다. 딱하게 여긴 제자들이 새 옷이나 질긴 양말을 올려도 “중이 기워 입고 살줄도 알아야 한다”고 호통 쳤다.
그래서 우리에겐 더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성철스님은 1981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 조계종을 이끄는 종정에 올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법문을 내리고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후일담이긴 하지만 군부의 전횡으로 암울했던 시대상에 대한 비판을 바랐던 종도· 대중들의 희망과는 달리 불교 본질이 회복되면 이 모든 것이 바로 잡힐 것으로 보고 그 같은 법문을 낸 것으로 여겨진다.
성철 스님이 열반 전 제자들에게 남김 유언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말로 “참선 잘 하그래이” 한마디뿐이었다. 마실 나가는 스님의 말 같았을 뿐 도를 구한 큰 스님이 열반을 앞두고 세상을 하직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예닐곱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면서 주고받는 작별인사 같은 친근감이 똘똘 감겼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보리(菩提)라던 큰 스님의 말은 곧 찐빵 한 개를 덤으로 우리 손에 꼭 쥐어주는 따뜻한 선물이었다.
성철 큰스님의 법문은 나보다는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의 표본 크기와도 같았다. “남편과 아들 가족을 위해 백날을 기도해봤자 그기 까지 이고 대중을 위해야만 복락이 내린다”고 법문하셨다. 이를테면 알아듣기 쉽게 해석을 붙이면 `백화점 사장` `구멍가게` 사장자리를 놓고 비유할 수 있는 말이다. 일체중생의 풍요한 삶을 위해 기도를 하면 인연법에 따라 그 복락(福)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복락의 크기가 다르다는 뜻이다.
1967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시작된 기도법도 유명하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백련암과 성철 큰스님을 따르면 전국 문도 사암에서는 철마다 1천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3박 4일간 기도를 올린다. 19년 전 20만 추모인파가 모여 스님을 떠나보내셨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밤새움 기도로 자신의 공부 길을 채운다.
그 유명한 `아바라` 기도는 먼저 108배로 자신을 가다듬는 참회로 시작된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로 향하는 진언도 염송하고 큰 스님이 산스크리트어(범어)에서 따온 진언도 수없이 염송하는 일정이다.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은 조계종은 이달 말부터 스님이 수행한 전국 24개 사암을 돌아보는 순례 행사를 갖는다.
또 스님의 일대기를 한국화로 재조명하는 대형 전시 행사도 갖는다. 전시회나 학술행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큰 스님에게 다가설수록 세상이 살아가는 이치는 더 밝아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