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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어휘 학습

등록일 2012-02-16 22:00 게재일 2012-02-1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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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대 영문학 박사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에서는 영어 단어를 암기하는 일이 수업시간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데, 과거 어느 강사가 한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단어를 외우게 하고 확인하는 방식이 영어 수업을 진행하기에는 제일 쉬운 방식이에요. 그런 경우, 대단한 실력이 없어도 쉽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암기한 단어는 곧 잊게 될 뿐 아니라 책을 읽다가 그렇게 외운 단어를 마주쳐도 언젠가 보았었다는 기억만 희미하게 날 뿐 그 의미가 감각적으로 즉시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별로 쓸모없는 지식을 익힌 것이 될 수 있다. 영어 단어를 전화번호나 역사적 사실을 외우듯이 하면 하루에 100~200개씩도 암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그 단어들의 사용방법이나 이미지가 익혀지지 않기 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지도 않을뿐더러 1분에 600단어 이상을 읽고 흐름을 꿰맞춰야 하는 독서환경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외운 단어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의 기능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오래전 한국에서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간 학생들 중에서 기억력이 다른 학생들보다 좋아서 단어를 잘 외우는 학생이 있었다. 하루에 200개도 거뜬히 외울 수 있는 학생이었고 SAT시험에 나온다는 단어는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SAT시험을 치는데, 영어 독해영역에서 나오는 지문이 무슨 내용을 말하는 건지 아무것도 이해가 안됐다고 한다. 심지어 스페인어로 쓴 글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모두가 그 학생은 적어도 고득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국내 영어 교육시장에서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단어 학습교재는 Vocabulary Workshop와 Wordly Wise이다. 학년별 시리즈로 편집되어 있어서 미국 내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교재이기도 하다. 각 학년마다 250~300단어에 대해 학습을 하게 돼 기계적으로 암기해도 누구든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평가방식, 부적절한 예문들, 복습과정이 없다는 단점 때문에 장기적인 학습효과가 없다고 본다. 실례를 든다면, SAT 시험의 독해영역에서 나오는 어휘 대부분이 이 교재들에서 암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칠 때가 되면 학생들은 그 중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처음 보는 단어인 듯이 다시 공부하게 된다. 그나마 시험이 끝나면 그 단어들을 다시 잊게 된다. 이렇게 망각과 재학습이라는 순환을 덧없이 반복할 뿐이다. 물론 독서를 많이 하는 학생들은 이런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공부한 것이 안개처럼 사라진다면, 그리고 길을 잃는다면, 목적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 공부해야 외운 단어들이 영어의 기초가 되고, 글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그 의미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결책은 단어를 감각적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능률은 좀 떨어질지라도, 어휘력을 익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독서이다.

단어가 지닌 감각적 이미지는 예문 안에서 짧은 드라마처럼 드러날 것이다. 그 예문 전체를 반복해서 읽어서 암기하는 경우에는 그 단어의 감각이 각인되는 것은 물론 그 단어의 사용법을 함께 익히기 때문에 작문 실력도 향상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 예문이나 다 좋은 건 아니다. 단어의 감각은 상황이 알맞게 설정된 예문들 안에 살아있다. 좋은 예문들은 대개 복문이나 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단어만이 갖는 독특한 상황이 그 안에 설정되어 있어서 그 단어가 가진 느낌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방식은 독서광들이 사전을 이용하지 않고도 많은 책을 읽으며 어휘력을 쌓아온 방식과 유사하다. 우리가 ”책을 많이 읽어라“는 학습방식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어를 감각으로 익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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