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때마다 요긴한 정보를 주는 친구가 한 명 있다. 모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올해 복직을 앞둔 미혼의 친구다. 대학 시절부터 총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나름의 신념으로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벗이다. 지난해에는 `나꼼수`를, 올해는 `강신주`를 소개받았는데 그로 인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
`나꼼수`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우리 시대의 뜨거운 감자다. 지난해 숱한 구설에 올랐지만 `나꼼수`는 인터넷과 SNS 정치의 서막을 연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의 영향력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젊은 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따금 낯 뜨거운 욕설과 막말로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지만 그들은 전혀 쫄지(?) 않는 눈치다. 하긴 `나꼼수`의 태생은 `골방`이 아니던가. 묵은 정치적 체증을 까스명수처럼 속 시원하게 내려준 그들의 직언(直言)은 권력에 빌붙어 스스로 정론직언의 붓을 꺾은 언론매체에 비하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하다. 편파와 왜곡, 선동, 과장을 밥 먹듯이 하는 언론매체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부끄러움보다는 `나꼼수`를 들으면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한결 값지다. `나꼼수`로 인해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괜찮다. 그저 제2의, 제3의 `나꼼수`가 나와 소통과 진실의 민낯이 우리 사회에 자주 드러나기를 고대한다.
올해는 `강신주` 이야기가 나왔다. 허름한 막창 집에서였다. 어쩌다 `강신주`라는 이름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삶의 철학이 없으니까 마음이 헛헛하다”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렇다. 롤러코스터처럼 마구 돌아가는 일상에서 많은 이들이 `왜?`를 잊고 산다. 우리의 삶터가 놀이동산인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매일 타는 롤러코스터 또한 놀이기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왜 우리는 헛헛한가?
`강신주`는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철학을 우리 삶의 핵심적인 사건과 연결시켜 풀어 간 `철학, 삶을 만나다`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노장사상을 전공한 동양철학자이면서 서양철학의 흐름에도 능한 그는 삶에 밀착한 철학, 쉽게 읽히는 인문학을 지향하며 늘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젊은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적 사유란, 자명한 것을 문제 삼는 것, 자명한 것에 거리를 두는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철학을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그는,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삶을 낯설게 돌아보도록 만드는 불가피한 사태가 도래하기 전에, 철학적 사유를 통해 미리 삶에 낯설어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철학은, 우리에게 `내가 나중에 알게 될 것을 지금 알 수 있게`해주는 힘을 갖게 해준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각이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과 조우할 때만 발생하는 것이다. 늘 집에 있던 엄마가 저녁 늦게까지 없을 때, 생전 아프지 않던 발바닥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시달릴 때, 매일 아침 7시45분이면 오던 통학버스가 오지 않을 때 등등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예외적인 사건의 발생, 그 사건과의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 바로 `생각`이다.
올해는 젊은 철학자, 강신주와 함께 나와 너와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려 한다. 삶의 비밀은 언제나 `만남`에 있는 모양이다. 오랜 친구로부터 `나꼼수`와 `강신주`까지. 입춘이 얼마 남지 않았다. 봄꽃처럼 화사한 만남의 순간마다 `철학적 사유`의 꽃을 팡팡 피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