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파주에 있는 당신 친정아버지 만나 뵈러 가기로 한 오후 세 시쯤이 되어서도 감감 무소식이다. 하기는 무슨 약속을 정확하게 잡아놓았던 것 같지도 않아서 저녁이나 밤에는 돌아오려나 보다 하고 또 기다렸다.
그런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은근히 무슨 사고가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밤 여덟시쯤 되었나 하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그 사람인가 보다 하고 전화를 받아드니, 어렵소, 이건 발신인을 밝히지 않은 전화인데, 내가 받고나자 몇 마디 웅얼거리는 듯 하더니 그만이다.
아하, 이게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났나 보다 하고 슬며시 마음에 초조한 생각이 든다. 회사 일로 바쁘다고,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슨 프로젝트를 내는 일을 해야 될 것 같다고 한 것도 같은데, 이 몸이 바쁘다 보니 제대로 새겨듣지도 못했던 것이 후회막급이다.
아들은 서울에 하나 있는 것이 만사태평, 자기 일에만 신경 쓰고, 앞날이 먼지 가까운지 생각도 없는 놈인지라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이거 경찰서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하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다. 내일이면 대전에 내려가야 할 텐데, 나, 무사합니다, 하는 말 한마디로 이렇게 마음고생 시킨 것을 다 무위로 돌리려 한단 말이냐.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또 함흥차사다. 그러고는 한참 있다 문자가 온다. 며칠째 연구기획실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설날까지도 일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다음 날, 설 전날이 되어 새벽바람에 케이티엑스라는 것을 타러 서울역으로 갔다. 예매는 그 사람이 미리 알아서 해놓은 것인데, 그냥 그것을 표로 바꿔야 타니 한 시간만에 대전이다. 아침 식사하는 자리에 쑥 들어가니 그 사람은 어디 가고 단 둘이 왔냐는 것이다. 이차저차, 이참저참 변명을 하고 보니, 하기는 지금껏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 새삼 생각키운다.
아들도, 나도 대전 집에 오자 이상하게 병들어 누웠다. 전날에 종합병원에 들러 주사 맞고 약 탄 것을 먹어서 그런지 몸에 전혀 힘이 없고 잠만 오는 것이다.
비몽사몽간에 텔레비전에서 `발레암 계곡의 마지막 전사`라는 것을 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나레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는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의 아들인데, 민족동화 정책 때문에 전부들 객지로 나간 동네 젊은이들과 달리 부족의 전통을 지켜가겠노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 때문에 들어 누워 어머니 수발을 받으면서 설날 하루를 온전히 허비하고 하룻밤을 더 대전 집에 머물게 되었다. 누워 생각하니, 그러고 보니, 내가 철 들어 집 떠난 후에, 그러니까 그건 대학 가겠다고 나선 때는 아니고, 스물 서너 살부터 세상 일에 마음이 들려 방황하기 시작해서 스물일곱 때쯤 결혼한 후로는 이렇게 혼자 집에 와서 잔 게 처음이라면 처음이다.
미레는 부족 전통을 지키겠다고 혼자 사흘 밤을 외딴 집에 머물러야 하는 성인의식을 치르고 굳건한 남아로 다시 태어났는데, 나는 사흘 밤 아니라 몇날 며칠 셀 수도 없는 나날을 집 떠나 살았다. 그동안 어머니, 아버지 모두 병 들어 하루도 편할 날 없었는데, 이리저리 모른 척만 해왔던 게 아니냐.
조금 더 힘들어 지시면 아무래도 서울에 올라오셔야겠어요. 한 마디 드리고 서울에 올라와 그러고도 하룻밤을 더 지내고서야 아내가 돌아와 몸을 간단히 씻고는 다시 출근을 한다. 합숙하고 출근은 다른 개념이라나. 이러고도 가족은 가족이고, 이산가족은 해후하는 것이란 말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