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연화봉과 금탑봉 사이 계곡에 자리한 청량정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4호)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으로 안동 부사를 지낸 이황의 숙부 송재 이우가 조카인 온계 이해와 퇴계 이황을 비롯해, 조효연, 오언의 등을 가르치던 건물이다. 그 뒤 퇴계 선생이 이곳에 머물며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도산십이곡을 저술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청량정사의 당은 오산이고 헌은 운루, 요는 지숙이며, 문은 유정이라 되어 있다. 일명 `오산당`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오산`은 중국 송 주자의 시 구절 `명명직조오가로(明明直照吾家)`에서 따온 것으로 `우리집 산`이라는 뜻과 `유가(儒家)의 산`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청량정사 마루 안쪽에 `吾山堂(오산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마루 우측 방에는 `지숙료(止宿寮, 머물러 잠자는 곳), 마루 좌측 방 입구에는 `운서헌(雲棲軒, 구름이 깃든 곳)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마루방 앞은 사분합 들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했고, 마루상부에는 청량산에 관계된 이황의 시 몇 편이 걸려 있으며, 건물 가운데 어칸 추녀 밑에는 청량정사(淸凉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한편, 청량사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열두 봉우리 중 연화봉 기슭 한 가운데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6)에 의해 중창된 천년 고찰로, 대웅전이 없고 약사여래를 모신 유리보전(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과 심검당이 있다. 편액에 쓰인 말대로 심검당(尋劍堂)을 보고 사찰에 웬 칼을 찾는 집이 있을까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아마도 승속에서 현세의 연을 끊기 위한 칼이 필요해서가 아닐까싶다. 유리보전의 편액은 공민왕의 친필로도 유명하고 약사여래는 종이 재질(닥나무)로 만든 지불(건칠불)로도 유명하다.
창건당시 33개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던 청량사는 봉우리마다 자리 잡은 암자에서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됐다. 필자가 `한국의 정자건축` 녹화를 위해 갔을 때, 주지에게 청량정사 내력을 물었더니 말도 하기 싫다며 손을 내저었다. 불교가 탄압을 받을 당시 청량정사의 유생들이 청량사의 스님들을 불러 유생들을 등에 업고 산 아래 낙동강 건너 마을까지 업어 나르게 했다고 한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