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초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주꾸미가 물고나온 청자로 인해 고려 도기사의 역사는 새로 쓰게 됐다.
지금도 신안앞바다에서 몰래 고려도자기를 건져 올린 어부들이 자주 경찰 출입을 한다고 보도된다. 신안 앞바다는 고려도자기의 보고다. 얼마나 더 깔려있는지는 짐작하기 힘들지만 고려도자기의 고향 같은 곳이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고려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윤택하게 빛내준 도공과 배, 사람의 생명, 눈물, 혼이 그만큼 쌓인 곳이기도 하다.
고려청자는 비색이다. 그 비색은 지평선 가까이 펼쳐진 연두 빛 하늘 색깔이다. 도자기를 굽는 기술을 전한 중국 도공들마저 상감청자엔 찬사를 보냈다. 일본에 들어가서는 고향땅에서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았지만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된다.
11세기 무렵 일본 불교의 교과서가 된 고려대장경 인쇄본은 주로 승려를 통해서 넘어가 지금까지 일본 국보로 모셔져 있다. 당시 고려의 앞서가는 인쇄기술과 청자의 비색은 일본상류사회가 두고두고 탐하는 귀한 물건이 되면서 도공들이 엉뚱한 피해자가 됐고. 인류는 신석기시대부터 생활에 필요한 그릇을 만들기 시작, 지금부터 1만년 전 도자기의 선조로 볼 수 있을 토기가 `비옥한 초승달지역`으로 불리는 이라크 북부지역 등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와 북방 유라시아 지역에서도 이들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이 칠이 전혀 입혀지지 않은 빗살문양 토기가 여러 차례 발굴됐으며 이 다음 시대부터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채색토기와 유약을 바른 도기 제작법이 인근 나라로 퍼져 나갔다.
비슷한 시기 중국 한(漢)나라에서는 도기보다 더 높은 온도로 굽어내는 자기를 만들어 냈다. 당(唐) 송(宋) 시대를 거치면서 더 좋은 도자기들이 만들어 졌고 여기서 유래된 `차이나(China)`라는 국명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고려자기는 사실 중국에서 들어왔다. 우리선조들은 가져온 그릇을 그대로 답습해낸 것이 아니다. 재창조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우리 것으로 탄생시켰다. 지금 유럽과 미주대륙을 K-팝으로 승화시켜 세계를 들끓게 하는 이치와 같다.
고려 청자하면 표지 인물로 등장하는 청자삼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이나 참외모양병(국보 94호)청자는 고려도공만 갖는 예술적·창조적인 아름다음을 뿜어내고 있다.
참외모양병은 술병보다는 꽃병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고려 인종(1123~46)이 묻힌 장릉(신증동국여지승람:개성서쪽 추정)에서 출토된 것으로 구전되는 이 청자 참외형병은 1916년 총독부 박물관이 한 골동상으로 부터 구입했었다.
송(경덕진가마)과 고려(강진 사당리 가마 등에서 출토)에서 비슷한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목이 짧고 굽이 낮아 조형미를 갖추지 못했던 병과는 달리 여덟 골이 밑으로 흘러 안정감과 볼륨이 살려져 목은 길게, 입술은 활짝 핀 꽃잎 형태를 갖추고 있다.
굽은 주름치마를 받쳐 입은 것처럼 조화를 부려 안정감을 살렸고 부드러운 질감과 비색이 천하의 명작을 만들었다. 잠시 상상을 해보면 인종이 서안에 두고 매일같이 어루만지다 못해 사후세계까지 끼고 간 천하의 명작이다.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68호, 간송미술관)은 그 형태는 송나라에서 유행했던 술병을 따왔지만 그 빛깔과 구름을 나는 학의 문양, 비색은 고려청자만이 갖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이 매병을 세상에 남긴 고려도공들의 예술혼과 기교를 지금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니 놀라고 놀라울 뿐이다. 신안 앞바다와 강진 땅은 영원한 청자의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