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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에 대한 조상들의 욕망 석빙고

영남이공대 교수
등록일 2011-11-24 19:54 게재일 2011-11-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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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석빙고 외부, 청도석빙고 내부
경북 청도에 가면 청도읍성 북측 개울가에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석빙고를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 1713년), 현풍 석빙고(보물 제673호, 1730년), 안동 석빙고(보물 제305호, 1737년), 경주 석빙고 (보물 제66호, 1738년), 창녕 석빙고(보물 제310호, 1742년), 영산석빙고(사적 제169호, 18세기 후반) 등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이며 그 구조가 거의 비슷하고 특이하게도 모두 다 경상도 지역에만 잔존하고 있다.

얼음을 인공적인 창고에 넣어 보관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B.C 1700년경, 시리아 남동부에 위치했던 마리의 군주 짐리-림(기원전1779~1757)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얼음집을 짓고 여기에 얼음을 넣은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유사에 서기 1세기 신라 3대 노례왕(유리왕)때 이미 얼음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지증왕 6년(505) 겨울에 해당 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토록 했다고 하고, 얼음 창고를 관리하는 빙고전이란 관청을 두고 관원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0년 충남 연기군 나성리에서 서기 3~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4 × 3.5m 규모의 저장구덩이 유적이 발견되었다. 학계는 구덩이 밑에 자갈이 깔린 배수로가 있는데다 인근에 금강이 위치한 점 등을 근거로 얼음 창고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이 백제시대의 것으로 확인될 경우, 조선시대 빙고보다 천년 이상 앞선 얼음 창고가 될 것이다.

조선 시대에 석빙고 얼음 채취는 매년 1월 소한과 대한 사이에 주로 이뤄졌고, 얼음이 12㎝ 이상 얼었을 때 잘라내었다. 캐낸 얼음은 가로 70~80㎝, 세로 1m 이상이 되도록 일정한 규격으로 맞춰 톱으로 썬 후에, 우마차를 이용해 석빙고로 옮겼다.

석빙고의 구조는 외부 기온의 영향을 적게 받고 보냉과 축열 효과가 있는 지하에 건축하였다. 지표면 아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닥은 안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낮아진다. 바닥이 경사져 저장된 얼음이 녹으면 석빙고 뒤의 개울로 연결된 배수구를 따라 흘러간다. 석빙고를 개울가에 만든 것은 배수를 쉽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여름철 석빙고 주변 온도를 낮게 유지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석빙고의 천정은 아치형이다. 이것은 공기의 대류현상에 의해 석빙고 내의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더운 공기는 위로 모이게 하여 환기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게 하기 위함이다. 석빙고를 밖에서 보면 마치 고분처럼 보인다. 천정 돌 위에 흙을 덮은 다음 태양 복사열 차단을 위한 잔디를 심었기 때문이다. 환기구도 밖에서 보면 낮은 벽체를 세우고 뚜껑을 덮어 빗물과 직사광선이 들어갈 수 없도록 설계돼 있다.

이렇듯 석빙고는 과학적인 토대위에 설계된 건축구조물로 꼽힌다. 조상들이 지혜롭게 건축한 석빙고의 원형 보존은 실로 소중하며 세계적 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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