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친척 관계에 있는 아리따운 여인을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이 못 생겼다고 생각한 나머지 감히 사랑을 고백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동료가 이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아주 잘생긴 남자였지만 시라노와는 반대로 말도 글도 형편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분 많다.
시라노는 그에게 자신이 여자에게 사랑을 대신 고백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한밤에 이 잘생긴 사내가 그 여자의 방의 베란다 밑에 가서 서 있으면, 자기가 나무 뒤의 어둠 속에 숨어서 그를 대신해서 사랑을 고백해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잘생긴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시라노가 그를 위해 말도 해주고 편지도 써주었다. 정작 여자 앞에만 가면 숙맥이 되기 일쑤인 잘 생긴 사내는 그의 말과 글에 사로잡힌 여자를 안타깝게 했다.
그러다 전쟁이 났다. 이 잘생긴 남자는 여자와 이별하고 전장에 나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사랑의 비밀을 알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수도원으로 가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시라노는 그런 그녀의 친척 오빠로서 언제나 다정한 사내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라노에게도 죽음의 날이 닥치고 말았다. 본래 문학을 잘하던 그는 특히 날카로운 풍자시로 권세 있는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의 재능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마침내 이를 견디지 못한 권력자가 그를 죽이러 암살자를 보냈다.
큰 부상을 입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게 된 시라노는 평생을 사랑해온 수도원의 여인에게로 간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이 애타게 사랑했던 말과 글이 잘생긴 남자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시라노는 슬퍼하는 그녀의 품속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다.
본래 풍자란 남의 도덕적 결함을 날카롭게 찔러대는 웃음이다. 그것은 권세 있는 사람들, 신분 높은 사람들, 돈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근엄한 척, 도덕적인 척 하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탐욕과 타락이 숨어 있는지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겉과 속의 괴리가 얼마나 심각한지, 겉으로 번드르르한 사람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폭로한다.
이 풍자는 유머나 해학과는 다르다. 유머는 사람이 가진 결함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정신적 여유의 산물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해학도 바로 그런 `미덕`이 있다.`춘향전`의 변학도는 탐관오리의 전형이지만 민중적 시각은 이것을 절대적인 대결의 대상으로 그려내지 않았다. 웃음으로써 비난하는 한편 용서를 베풀기도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불쌍해서 봐줬다고나 할까?
풍자는 그러한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힘 있는 자들의 도덕적 위선을 꾸짖어 현실에서는 강한 그들의 힘을 문학 속에서 무력화 한다. 이 비판의 서슬이 새파랄수록 풍자의 효과는 커진다. 그러나 바로 이 효과 때문에 풍자가 자신은 위험하게 된다.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세상을 향해 힘 있는 자들의 위선을 조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풍자가의 체질적 `결함`이다. 독일 시인 하이네가 그러했고, 젊었을 때의 김지하 시인도 그러했다. 덕분에 그들의 삶은 위험이 가득했다.
우연한 기회에 `나꼼수`를 듣게 됐다. 벌써 27회째나 된다던데, 이제야 들었다. 진중권씨가 `나꼼수` 사람들을 향해 `막장 비판`이라고 비난을 가했다고도 한다. 필자가 보기엔 진중권씨나 `나꼼수` 사람들이나 오십 보 백 보다. 그만큼 풍자가 이 시대의 대세라는 걸 입증하는 분들이다.
왜 이런 `나꼼수`가 그렇게 인기일까? 그것은 이 시대가 위선의 시대라는 뜻이 아니겠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어떤 사람들이 풍자가의 자질을 드러내고 그것 때문에 인기를 얻는 시대, 그런 시대는 돈과 권력이 그 정당성을 의심받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