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 이후 변호사로 활약하던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은 정치적으로도 라이벌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사사건건 대립하는 원수지간이었다. 해박한 지식과 언변의 해밀턴과 인간 심리를 꿰뚫어보는 구렁이같은 버는 법정에서도 자주 충돌했다.
이 후 정치계에서 거물이 된 두 사람은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배후에 상대가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다투게 된다. 그러다 버가 대통령 선거에 나오자 해밀턴은 버의 상대후보인 제퍼슨을 지지한다. 당시 법에 따라 2위를 한 애런 버는 부통령이 된다. 해밀턴은 계속 버를 비난하며 딴지를 걸었고 참다 못한 버가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1859년 9월 13일 이른 아침 캘리포니아 멀씨드 호수 옆 계곡. 북부 출신으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연방상원의원 브로드릭과 노예제도 연장을 주장하는 대법원장 데이비드 테리가 결투를 벌였다. 두 사람은 증인 7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등을 맞대고 서서 10보 걸어간 뒤 돌아서 총을 쏘았다. 브로드릭이 먼저 쏘았으나 총알은 테리의 발 앞에 떨어졌고 이어 어깨에 총을 맞은 브로드릭은 사흘 뒤 숨졌다.
승자와 패자가 단판 승부로 결판나는 냉정한 현장. 밤샘 토론을 벌일 것도, 문에 못질하고 점거 농성을 벌이고 몸싸움 할 일도 없다. 논리도 선악도 총알이 결정한다. 한물 간 서부영화에서 등장하는 결정적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정치권의 니전투구를 보면서다.
한미FTA가 정권이 바뀌면서까지 국회 비준을 얻지 못하고 전국을 찬성과 반대의 대립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경제학자, 국제통상 전문가, 정치인들이 모두 패가 갈려있고 산업계에서도 득실에 따라 찬반이 다르다. 국민들은 헷갈린다. 왜 최악의 상황만 가정하는지, 또는 왜 긍정적으로만 사실을 전망하는지 비전문가인 다수 국민들은 오직 지지하는 정당이나 지도자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민주당 손학규 민주당 대표나 정동영 민주당 의원은 지난 정권 한미FTA 찬성론자였다. 국가의 생존전략이라거나 향후 50년간 한미 관계를 지탱해 줄 기둥이라 했던 그들은 지금은 오히려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한미FTA 절대불가를 주장한다. 거꾸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야당 시절 ISD(투자자 국가소송제)는 국가주권을 미국에 바치는 것이라며 한미FTA를 반대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때는 몰랐다”고 변명한다.
그러니 국회는 끝장 토론을 한다 해놓고는 서로 자기 말만 하고, 상대의 주장에는 아예 귀를 막아버린다. 들어봐도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억지라는 주장이다. 참으로 답답한 억지라 아니할 수 없다.
비준동의안 처리를 반대하는 야당은 국회 상임위 회의실을 점거하고 이를 뚫으려는 여당과 몸싸움을 벌인다. 익숙한 장면인데, 눈에 띄게 한복이나 흰 와이셔츠를 입고 얼굴을 드러낸 정치인들은 아무래도 자신의 활약을 지지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로 보인다. 법 절차에 따라 선출된 국회의원들이고 서로 견해가 다를 때는 합의하는 법과 제도적 장치가 엄연히 있지만 소용이 닿지 않는 현실이다.
여당은 10일 비준동의안을 강행 처리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야당은 결사반대다. 이럴바에야 차라리 결투라도 해서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하니까 비준해줘야 한다거나 또는 반대해야겠다면 이는 해밀턴과 버처럼 차라리 결투로 끝장내라는 개인적 의견이다. 그런 사적인 악감정이 아니라면 정당간 끝장 토론이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국회에서 쇼 같은 몸싸움하지 말고, 차라리 결투를 해라. 먼저 결투를 합법화해야겠지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