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는 하오. 주제넘은 짓이오. 내가 아무래도 말 많은 바본가 보오. 젊은 날이 억울하게 느껴지나 보오. 뭐 그리 슬픔이 많은 척 하느냐구? 그렇소. 나는 불행의 인자보다 불행의 포즈가 더 큰 위선자요. 그래도 한 번 말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은 걸 어쩌오?
어제는 어플리케이션을 디자인하는 사람을 만났소. 이제 출판사에 앉아서 원고지 교정 보던 당신의 시대는 어림도 없소. 이 한국에서도 우주선 실험을 하고, 바다 건너에선 원자력 발전소가 망가지고, 리비아라는 나라가 있어서 카다피라는 독재자가 끝장이 났다오. 북쪽에선 김정일이라는 자가 있어 그 나라에 나가 있던 인민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구려.
그럴게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게요. 당신이 스물일곱 나이로 요절을 할 땐 세상에 없던 일들이니 말요. 신기하지 않소. 당신이 그렇게 떠난 뒤에도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이.
어이, 김해경 이상 씨. 어플리케이션이 뭔지 아오? 스마트폰이 뭔지 아오? 아이패드가 뭔지 아오? 실은 돈만 있으면 그런 데다 탑재하는 잡지를 만들고 싶소. 안타깝게도 돈이 없소. 사업을 해 본 것도 없소. 당신처럼 다방을 하다 망가진 적도 없소. 그래도 난 당신보단 돈이 많소. 빚보다는 재산이 아주 더 많소. 그래도 문학잡지를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에 올릴 힘은 없는가 보오. 그래서 종이 잡지라도 만들 궁리를 했소. 당신이 한 번 읽어봐 주시구려. 돈도 생기기 전에, 원고도 들어오기 전에 창간사부터 썼다오. 이하는 그 요점이라오. 정색을 하고 썼다오.
첫째, 우리 책은 뉴스와 정보를 창조하는 잡지가 돼야겠다. 남의 소식을 받아쓰는 잡지가 아니라 남에게 먼저 주는 잡지가 돼야겠다.
둘째, 우리 책은 보는 기쁨이 있는 잡지가 돼야겠다.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만 내리 달리는 잡지가 아니라 글도 보고 그림도 보고 사진도 보는 잡지가 돼야겠다.
셋째, 우리 책은 현대문화의 첨단 지대를 함께 살아가는 잡지가 돼야겠다. 철 지난 문화를 보수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맨 앞에 가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아는 잡지가 돼야겠다.
넷째, 우리 책은 우리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잡지가 돼야겠다. 원형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줄도 모르는 죄수처럼 되지 말고, 문학의 안과 밖을 다 보는 잡지가 돼야겠다.
다섯째, 우리 책은 지금 삶에 더 밀착해 있는 잡지가 돼야겠다. 인생에 대한 추상적인 해석에 머무르지 말고 언어가 살아 있는 삶과 만나는 공간이 돼야겠다.
여섯째, 그러고도 우리가 훌륭한 소설과 시를 이 책에서 볼 수 있고, 날카로운 비평적 시선을 이 책에서 느낄 수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 문학인들, 다른 예술인들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렇소. 이 잡지는 단 일 년을 살더라도 보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소. 어떻소? 야심차지 않소? 너무 경박한 것 같소? 그렇다오. 그런데도 나는 지금 한껏 가벼워지고 싶구려. 한없이 가벼운 것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요술을 부려 봤으면 싶소. 미래가 과거와 동거하는 이상한 정부를 세워보고 싶소.
당이 있느냐고 물었소? 그렇기는 하구려. 당신이 그때 “아당만세”를 외친 그 “아당”이 내게는 적구려. 내게는 겨우 몇 사람의 동반자가 있을 뿐이구려. 하지만 어떻소. 문학에서 언제 숫자가 글자를 이겨본 적 있소?
오늘 문득 당신에게 편지가 쓰고 싶어졌소. 기괴하게 웃는 당신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졌소. 모를 게요, 남들은. 우리가 이렇게 친하다는 것을. 우리가 가끔은 편지도 주고받을 정도라는 것 말요.
거기도 단풍 들었소? 잘 지내시오. 내 또 연락하리다. 그나저나 거기선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소. 폐병 든 그 수척한 몸 더 축내서 뭣하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