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내가 호박을 여러 덩어리 들고 왔다.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어보니 시골길에서 어떤 할머니를 차에 태웠더니 말을 않고 잠잠히 가다가 차 앞에 호박을 따서 리어카에 싣고 가는 아낙을 보고 가을 호박 자랑을 늘어놓더란다. 하도 호박이야기가 구수하고 좋아서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호박을 샀는데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할머니가 내리면서 “아지매 복 받을 겝니다”라고 했단다. 그 `아지매`라는 말에 얼마나 정감이 갔던지 한참 기분이 좋았다고 아내는 호박꽃처럼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이제 중년의 아내의 외모는 화사하고 아름답지만 역시 내면은 세월을 속일 수 없는 나이가 되었는가 보다. 아내가 감동한 `아지매`라는 말에는 호박처럼 복스럽고 그득하여 넉넉한 데가 있는 것 같다. `새댁`이라고 불렸으면 더 좋았을 삼십대에는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어쩌면 장미꽃처럼 가시를 드러내었을지도 모르겠다. 호박과 호박꽃에는 이처럼 수수하고 수더분하고 복스러운 중년의 향기가 배어있다. 어쩌면 깊은 아름다움을 갖춘 복덩어리이다. 그래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고 했으리라. 그래도 호박에는 못미더운 어떤 부분이! 있는 걸까. 부정적인 속담들이 많다. 그것은 쭈글쭈글해진 늙은 호박에 대한 이미지 때문은 아닐까. 송상욱 시인의 동시는 그런 호박의 깊고 오래된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바싹 마른 넝쿨이/ 전설처럼 지나온 자리에/ 호박덩이 하나 집 짓고 있다/ 그 속에 젓니 난 아이들을 키우는/ 늙은 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사람들은 다른 열매들이 다 익은 것에는 `늙은`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서 다 익은 호박은 왜 `늙은호박`이라고 부르는 걸까. 그걸 다음 동시를 읽으면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안도현 시인의 `호박꽃`이란 동시인데
호호호호 호박꽃/ 호박꽃을 따버리면/ 애애애애 애호박/ 애호박이 안 열려/ 호호호호 호박전/ 호박전을 못 먹어
처음 덩어리진 호박을 막 태어나서 자라는 아이호박이라는 뜻으로 `애호박`이라 했으니 다 익은 호박은 `늙은호박`일 수밖에 그럼 `청년호박`이나 `중년호박`도 `아지매호박`이나 `아저씨호박`도 있으려나. 그래도 `중년호박`이란 말이 없고 보면 그 중간 것은 맛부터 떨어지거니와 어떤 요리에도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늙은호박은 산모들의 산후조리에 좋은 `호박소주`나 `호박죽`, `호박떡`, `호박국수`, `호박범벅`, `호박전`을 만들어 먹고 애호박은 `호박무침`, `애호박된장국`, `애호박된장찌게`, `애호박국수` 등을 해먹는다.
아직도 남아있는 호박에 관한 속담으로 호박이야기를 맺는다면 `참깨 백 번 구르는 것보다 호박 한 번 구르는 것이 낫다` 는 말이 남았다. 이건 늙은 호박을 빗대어 하는 말일 것이다. 참깨가 가진 그 톡톡 튀는 자잘한 이미지보다 훨씬 깊고 지혜로운 늙은 호박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호박처럼 둥글둥글하게 처신하라`는 말도 그런 맥락을 담고 있다. 그런데 `뒤로 호박씨 깐다`라는 말은 아무래도 호박의 불명예가 될 것 같다. 이 속담은 원래 `밑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라는 말이었는데 밑구멍 같은 단어는 좀 상스러우니 `뒤로` 라는 단어로 순화해서 쓰고 있다. 겉으로는 점잖고 의젓하나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엉뚱한 짓을 하는 경우를 비유한 것인데 사실 신문에 가끔 나는 사건 기사들을 생각해보면 `호박씨 까는 것` 만큼 남들을 즐겁게 해 주는 일도 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