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자 25% 비정규직, EU는 14%
기업, 경기부진에 정규직 채용 기피
스페인인 실비아의 상황이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홍보분야 석사 학위까지 갖고 있는 24세의 이 여성은 2년 이상 풀타임 인턴사원으로 일했으나 그런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린다.
그는 정규직 사원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한달에 300유로(약 46만원)를 받는다. 그것으로 버스승차권과 점심을 사먹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부모 집에서 나오고 싶지만 그럴만한 수입이 아니다.
실비아는 그러나 다국적 기업인 이 회사가 비정규직 근로자 이용을 제한하는 법규를 위반하고 있다고 감독당국에 고발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자신은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졸업반에 30명이 같이 있었는데 나는 취업 면에서 잘 풀린 편에 속한다”고 했다.
청년 실업률은 40%를 넘고 전체 실업률도 5명 중 한 명꼴인 스페인은 유럽연합(EU) 국가 중에서도 실업률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실비아와 스페인의 이런 사정은 이웃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하다.
이들 나라에서는 갈수록 많은 사람이 이른바 `정크잡`이라는 취약한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관광과 농업, 건설 분야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비정규직이 이제는 거의 모든 분야의 회사에 확산되고 있다.
경기 부진이 심화되고 유로존의 재정 위기가 악화되면서 기업들은 퇴직금과 각종 복지혜택을 주어야 하는 정규직 채용을 그 어느 때보다 기피하기 때문이다. 지금 스페인 취업자의 4분의 1은 비정규직이며 포르투갈은 23%나 된다. EU 전체로도 14%에 이른다.
그 결과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탈리아에서는 2개 층의 취업구조가 생겨나고 있다. 한쪽은 중년층으로 각종 복지혜택이 따르는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를 갖고 있으며 이들은 해고하기에 큰 비용이 들고 각종 법규의 보호를 받는다. 다른 한쪽은 비정규직의 회전문에 갇혀 있는 젊은이들이다.
이런 이중 구조는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것으로 각종 연구결과가 지적하고 있다. 싼 임금에 근로자들이 장기간 묶여 있으면서 생산성이 타격을 받고 결국 남유럽의 경쟁력은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다.
스페인에서 `밀뢰리스타`라고 불리는 월 1천유로(그외 수당 등 복지혜택은 없다) 짜리 근로자들은 사실 어제오늘 생긴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저 잃어버린 세대들이 점점 더 미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국립방송통신대학의 호세마리아 마린 교수는 “한달에 1천유로를 받는 비정규직은 그나마 괜찮은 일자리”라면서 “밀뢰리스타는 그동안 좋지않은 것으로 치부돼 왔지만 지금은 좋은 것이 돼버렸다”고 전했다.
로마에 사는 페데리코(27)씨는 2009년 대학 역사학 전공을 졸업한 후 비정규직을 전전해왔다. 지금 그에게는 매월 1천유로 받는 비정규직 자리조차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보인다. “오늘 일년간 일할 자리를 놓고 취업 인터뷰를 했는데 회사에서 하루 10시간 근무에 월 500유로를 제시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도 부모님 집에서 나오고 싶지만 집 임차 계약은 정규직 취업 계약서가 있어야 맺을 수 있다. 15~24세 이탈리아인들의 4분의 1이 실업 상태인 상황에서 그는 이제 취업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가기 위한 발판이지만, 남유럽에서 현실은 점점 더 그렇지 않게 돼가고 있다. 기업들이 해마다 비정규직을 뽑아서 정규직처럼 부려 먹는 현실은 1990년대 미국에서처럼 “영구적 비정규직”을 낳고 있다. 포르투갈 한 노동전문가는 포르투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이 1990년대 후반 50%에 달했지만 지금은 20% 아래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유럽연합은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들이 고용과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취업 증가를 유도하도록 권고해왔다. 스페인 사회당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지난해 노동시장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일년도 안돼 원위치가 됐다. 그런 개혁 조치가 취업을 늘리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실업률만 계속 높였기 때문이다. 스페인 노동장관은 노동시장 개혁조치 철회와 관련해 “사람들이 일자리 없이 지내기보다는 비정규직이라도 일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리=윤경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