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강의를 듣는 학생은 모두 80명 정도. 지금부터 5,6년 전에도 최영미 시인을 초청한 적이 한 번 더 있었는데, 그때 학생들의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최 시인의 시집`돼지들에게`의 힘이 지금보다는 더 셌다.
이번에는 은근히 걱정을 했다. `문학과 대중문화`를 수강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이공계 학생들인데다가 세대적인 격차도 몇 년 전과는 또 달라진 때문이며, 특히 요즘 학생들은 문학보다는 비주얼이 강한 영상매체들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의 최영미 시인은 중견 연기자 같은 활력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자신 스스로 말하듯이 연기자적 자질을 갖고 있었다. 히스테리컬한가 하면 말괄량이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고상한 천품을 가진 시인 같기도 한, 복잡한 국면들이 스쳐 가면서 학생들은 점차 이 시인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특히 그녀가 대학생 때 데모를 하다가 경찰에 잡혀가 유치장에 갇혔는데, 그때 유치장 건너편에 수감되어 있던 남학생들이 교도관을 통해 소개팅을 제안해 왔던 것이며, 밤에 펼쳐지는 노래자랑 대회 이야기를 하자, 학생들은 자신들과 너무 다른 80년대 대학생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이날 그녀의 강의 주제는 `나의 시 나의 축구`. 왜 축구냐 궁금하다면 이 시인이 최근에 펴낸 산문집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보아도 된다.
그녀는 작년 겨울인가 유럽으로 가서 박지성 선수도 만나보고, 이청용 선수도 만나보고, 유럽 축구 리그를 소개하는 글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나오는 영문판 축구잡지를 정기구독하다시피 하는 축구광에, 시합을 보는 전문가적 안목까지 갖추고 있는 특이한 문학인이 바로 최 시인이었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학생들의 질의를 받게 되자, 한 남학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축구는 뭐냐.
사실 이 이야기를 위해서 최 시인은 서두에 자기 아버지 얘기를 아주 길게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익 청년이었음에도 이승만 정부`쪽` 사람이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 아래서는 여러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최 시인은 영어 회화에 능숙한데, 그것은 고등학생 시절에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외국인들이 다니는 교회에 다니도록 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최 시인은 말했다. 자기에게 축구는 자기 아버지의 삶에 비친 한국의 현대사처럼 어두운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마력을 가졌다고. 그녀는 축구장에서만큼은 정의가 살아 있노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강의 도중에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도 독특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녀는 무슨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스티브 잡스는 뛰어났고 여러 면에서 훌륭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사람 때문에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넘쳐 나느냐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최영미와 스티브 잡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 다 창조하는 삶에 관계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최영미 시인이 문단에서 아주 고독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의 축구열은 그녀의 고독한 삶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그녀는 혼자 지방 도시에서 살고 있으며, 양노원에 계신 아버지와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명징, 투명하다. 그리고 메시지가 간결하면서도 날카롭다. 그런 그녀의 시들을 읽다 보면 창조하는 행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더욱 거대한 창조자였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 가운데 최상의 것은 역시 매일매일 새로움을 만들어 가는 창조적 삶이다. 일상에서, 관습에서, 규칙에서 얼마나 벗어나 어떤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는가. 이것이 삶을 재는 중요한 척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