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목재는 육송(陸松, 소나무)이다. 우리나라의 소나무는 강인하다. 송진이 풍부해 마를 때 자작자작 갈라지는 구열상(龜裂狀)을 보이기는 해도 더 이상 갈라지거나 터지지 않고 천년을 버틴다.
문화재 현장에 가보면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는 구부러진 소나무를 대들보에 적절하다고 사용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것은 목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특성을 대목(大木)이 최대한 살려서 사용하려 한 것인데, 이와 같은 무작위(無作爲)한 기법의 요소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축의 특성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런 것을 통해서 옛 조상들은 대자연 속에 비록 인위적인 건축물을 짓는다 하더라도 결국 자신과 건축을 자연과 융합시킴으로써 자연의 순리대로 살고자 했음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史禍)때 화를 입은 탁영 김일손(濯纓 馹孫, 1464~1498)을 배향한 `청도 자계서원` 입구에 있는 중층 루건축인 영귀루 상층에 올라 천장을 올려다보면 서까래, 도리, 보와 같은 천장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며놓았다.
그 중 대들보는 유난히 구부러진 큰 나무를 사용하였다. 격이 떨어지는 건물이나 보가 천장 속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들보는 외부로 노출되어 그 건물을 꾸미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건축물에 휜 부재를 대들보와 같은 주요 부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점차 나타난다. 이것은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연목 상태의 휜 부재를 기둥으로 사용한 것은 선사시대 이후 계속해 사용됐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건물에서는 기둥을 완벽하게 치목해서 사용하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건물에서도 자연목 상태의 휜 부재를 사용한 경우가 많아진다.
고종 8년(1871)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84년 복원된 청도 자계서원 영귀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건물이다. 루 상부에 오르면 대들보 뿐만 아니라 다른 부재들도 대부분 휜 부재들로 구성되어있다. 나무는 밑동이 굵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게 자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둥은 나무가 생긴 모양대로 나무의 아래쪽을 기둥의 하부에 놓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야만 보는 이의 눈에 자연스럽고 안정되게 느껴진다.
그런데 영귀루 상층의 기둥은 어떤 연유에선지 이집을 지은 대목이 거꾸로 세워 놓았다. 아직 문화재 일을 하면서 보지 못한 경우이고 건축 구조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 대목이 왜 그랬을까?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