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을 찾으면 단풍은 `기후의 변화로 식물의 녹색 잎이 빨간색, 노랑색, 갈색 등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라고 적혀있다. 정말 백과사전은 정장을 입고 또박또박 길을 가르쳐주는 신사 같다. 그러나 문학사전에서 찾으면 단풍은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서정주),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 것네.`(김영랑), `신이 주신 /마지막 황금의 가사를 입고 /마을 뒤 언덕 위에 호올로 남아 서서 /드디어 다한 영광을 노래하는 /한 그루 미루나무`(유치환), `단풍이 지오 /핏빛 저 산을 보고 살으렸더니 /석양에 불붙는 나뭇잎같이 살으렸더니`(피천득), `보고 싶은 사람 때문에/ 먼 산에 단풍 /물드는 /사랑`(안도현), `왼 산이 통째로 살아서 /가쁜 숨 몰아 쉬는 모습을//다 못 타는 이 여자의 /슬픔을 ….`(나태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도종환), 이런 내용을 담은 문학사전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시어사전에는 비슷한 게 나올까. 그러나 얼마나 단풍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가. 요즘 K-POP 유행을 만들어내는 걸그룹에 빗댈 수 있을까. 그건 너무한가. 아니면 우아하면서도 다채로운 발레나 뮤지컬에 빗댈까. 좌우간 정장의 신사는 아니다. 시는 이처럼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와서 짧은 빛으로 사라지는 매혹처럼 그러니까 단풍처럼 그런 것, 가을이 오면 시집 한권이라도 들고 가을함께 읽으면 좋겠다.
`늦가을 찬바람 을씨년스런 나무 /술잔 손에 든 쓸쓸한 노인 /취한 모습 서리 맞은 나뭇잎 같아 /불그레하지만 청춘은 아니라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노인과 단풍잎` 이란 시다. 몇 년 전 외삼촌은 중국 백거이의 고향 허난성에 다녀왔다. 바로 성씨가 백씨라 백거이의 후손이라는 것만으로 정감을 안고 뿌리를 찾아 나섰던 것이라 했다. 이런 옛 시인들의 깊은 맛을 이 가을에 우려내어 차 처럼 마셔도 좋겠다. 아니면 재작년에 나온 나의 시집 `모리라는 말`을 보내드렸더니 나에게 `모리시인`이란 휘호를 내려준 서정춘 시인의 시들은 어떨까.
`여러 새가 울었단다 /여러 산을 넘었단다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단다` 짧은 시지만 `단풍놀이`라는 시의 제목에 맞게 깊은 울림과 여운이 있다. 시의 여백 속에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온 새들이 있고 그 새들의 모습은 단풍, 말을 더 첨가해서 무엇하겠는가마는 재미있다 그래서 놀이라고 했나보다. 또 다른 맛을 골라보면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깊게 생각하며 높게 생각하는 시인 백석의 시는 어떨까.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느뇨 /빨간 정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즐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살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사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개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여태껏 단풍을 사랑했지만 봄의 복병을 경계하듯이 이 단풍의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올라오는 것을 경계하라고 한다. 시가 몽상을 깨울 때도 있나보다. 낭떠러지와 죽음으로 치닫는 저 붉음을 위태로운 사랑에다 비유하다니 백석은 젊고 아름답고 현란한 여인인 단풍을 참으로 사랑했나보다. 이렇게 단풍이 든 시집들을 뒤적거리다 보니 가을이 성큼 문 앞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