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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화강(松花江)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9-20 23:44 게재일 2011-09-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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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공공이미지 코디네이터

쑹화강(松花江)은 우리민족의 한이 깊게 서린 젖줄 같은 강이다. 해란강 일송정 용정 청산 연길 등 강물을 따라 붙는 이름들은 내 피붙이처럼 살갑게 다가서는 지명들이다.

박경리의 장편소설 `토지`나 안수길의 `북간도`를 통해서 더 친숙해진 간도(間島)와 만주 땅은 우리민족에겐 아련히 떠오르는 정신적 고향이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끼여 바다의 섬처럼 보이는 곳이라 해서 간도라 했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길이 2천여km의 쑹화강(松花江)은 간도를 가로질러 만주땅 동북평원을 돌고 돌아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을 적시고 러시아 아무르강을 만나 동해로 들어가면 끝이다.

연변이 함경도에서 건너온 동포들이 집단 거주하는 곳이라면 지린성 통탄구에는 경상도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최근까지(지린성 아라디촌) 집단 마을이 존재한다는 신문(조선일보 8월4일)보도는 더 흥미롭다.

쑹화강을 바라보는 언덕 빼기에는 유난히 무덤이 많다. 일본 강점기 일제의 수탈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살았던 선조들이 영면하는 땅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말(1945년)까지 만주에 살았던 우리 동포는 170만 명이 넘었다. 아직도 해란강 용정 훈춘시 헤이룽장성 일대에는 볏짚 지붕을 얹고 새끼줄로 가로세로를 두른 초가집이 남한 땅 어느 곳보다 더 잘 보존된 곳이 많다.

간도는 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민족이 3천300년간이나 지배했던 땅이어서 우리민족의 가슴속에 남는 영원한 고토(古土)다. 더욱이 쑹화강은 하천의 신 `하백`이 살았던 강이자 주몽은 쑹화강의 천년 영물 거북의 등을 타고 강을 빠져나와 고구려를 창건했다.

중국은 이런 땅을 1712년 조선과 청은`압록강과 토문(土門)강`을 경계로 삼는다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여진은 이 간도땅을 민족 발상지라면서 한 때는 주민이 사는 것을 막기도 했지만 어림없는 우리 땅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보다 훨씬 먼저 부여가 자리 잡은 땅이었고 고구려를 세우기전 주몽이 소년기를 보낸 땅이어서 우리에겐 더 정겨운 곳이다. 그래서 쑹화강은 지금도 살아있는 영토여서 불씨를 안고 있다. 그 상류의 가느다란 하천 이름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엇갈린 입장이 명료하게 정리되어야 한다. 토문강이 두만강이냐, 쑹화강 상류의 지류냐를 밝힐 필요가 있다.

고종 22년(1885)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청나라 관리들과의 협상에서 토문강은 숭화강의 지류가 명백하니 간도는 우리 영토라고 주장했다. 티베트는 물론 위구르까지 자국 영토로 집어넣은 중국의 대욕으로 인해 이웃들이 피해를 입는 극명한 사례다.

1995년 9월4일은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간도 국경협상 대표 이중하는 청나라 측이 간도를 넘기라는 말에 “내 목을 쳐라. 국경선은 한치도 변경할 수 없다”고 불호령을 내리고 지킨 땅이다.

고인이 되신 박경리 선생은 이중하를 두고 “구한말 자칫 청의 위세에 눌려 빼앗길 뻔 했던 간도를 지켜 낸 역사적 의인이다”라고 했다. 이중하는 일제가 훈장과 3천원의 은사금을 내렸지만 불같이 화를 내며 돌려보냈다.

일제는 훗날 내린 작위(후작)까지 거절한 이중하를 잡아다 눈에 송충이를 집어넣고 못된 고문을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던 의인이시다.

쑹화강은 이런 저런 우리민족의 애환을 품고 오늘도 유장하게 흐른다.

시인 파인 김동환이 남긴 `송화강 뱃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움이 가득 묻어 있다. 구름만 날리나/ 내 맘도 날린다/ 돌아보면 고국이 천리런가….

이런 쑹화강이 지난 2005년 중국이 열을 올리는 화학공업단지 건설로 인해 벤젠 오염 파동을 겪는 등 여전히 오염이 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나 그곳의 추석명절만은 한국에서는 사라진 민속놀이를 통해 며칠씩을 즐긴다고 하니 외로울 때 기댈 어깨가 없는 한국사회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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