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난 음식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화목 하는 것이다. 성경 잠언 15장 17절에 “여간 채소를 먹으며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한다.
이번 추석에 우리 모두는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는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화평케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과 거리가 먼 것이다.
우리 가정도 명절이 그리 신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작년 추석에는 가족 수양회를 했다. 예배가 있고, 나눔이 있고, 섬김이 있고, 대화가 있었으며, 화내는 것이나, 큰 소리나, 얼굴 붉힘이나, 기분 나쁜 일은 없었다. 첫날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예배로 시작하면서 우리는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세 번 외치며 조율을 했다.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보낸 명절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의미 있었다. 명절에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화평이다.
지난 일요일은 9·11테러 10주년이기도 했다. 10년 전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테러리스트가 비행기를 납치한 채 돌진하여 3천여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세계는 경악을 했고, 희생자들과 가족들은 그 날의 아픔을 잊지 못한다. 인류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종잇장처럼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가족과 함께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주변에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당시 참상이 그대로 남아져 있었다. 육중한 H빔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고, 숱한 사연, 아픔을 담은 편지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세 가지를 묵상했다. 첫째, 자존심, 솟아 있던 자긍심, 어쩌면 교만일 수 있었던 것이 하루아침에 꺾였구나 느꼈다. 둘째,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테러범들, 인간의 완악함의 극치를 발견했다. 셋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소방관 300명의 희생을 보면서 인간의 숭고한 사랑, 신앙, 헌신을 보았다.
세상에는 평화처럼 좋은 것이 없지만, 어디에도 참 평화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출생한 노벨(1833~1896)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다. 세계 과학의 진보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발명은 선용되기보다는 악용되어 무기에 활용됐고,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노벨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소유물을 팔아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증했고, 평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상을 주도록 한 것이 1901년 노벨평화상의 기원이 됐다.
우리 중에는 화평을 만드는 사람(Peace maker)가 있는가 하면, 다툼을 만드는 사람(Trouble maker)도 있다. 다툼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섬김보다 대접받기를 즐겨한다. 남과 상관없이 말한다. 마음이 좁다. 그러나 화평을 만드는 사람은 양보한다. 격려와 칭찬의 말을 한다. 섬긴다. 우리 가정과 사회가 더욱 화평을 만드는 사람으로 가득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