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조선시대 청도 객사 도주관(道州館)

이경우 기자
등록일 2011-09-08 21:06 게재일 2011-09-08 18면
스크랩버튼
조선시대 청도 객사 도주관, 대원군의 명의 세운 척화비
조선시대 관아 건축은 왕궁이나 큰 사찰의 법당에 버금가는 서열로 고을의 생활과 정치의 중심이었다. 당시 관아 안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政廳)인 동헌과 그의 식솔이 거주하는 내아, 국왕의 위패를 모시고 공적 여행자를 맞이하는 객사, 고을의 징세에 관여한 향청, 아전의 집무처인 질청, 범죄자를 치죄하는 감옥 등이 있었다.

이러한 건물들은 그곳에 근무하는 신분의 정치적 지위를 고려해 설계됐다. 특히 이중에 중요성을 갖는 건물은 객사와 동헌이었으며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독립영역으로 분리됐다.

경상북도 청도에는 조선시대 객사로 쓰이던 도주관(道州館)이 있다. `도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관아 안에서 그 지방의 이름을 딴 대표 건물이 동헌이 아니라 객사라는 사실에서 왕권 중심의 철저한 위계성을 엿볼 수도 있다.

1670년대 건립된 도주관은 왕을 상징하는 위패를 모신 정청 양쪽에 동ㆍ서헌의 접객시설을 갖춰어 이곳을 들리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기둥을 건물 폭보다 높게 만들어 다른 건물보다 고준한 느낌을 주도록 꾸몄으며, 동ㆍ서헌은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좌우 대칭되게 앉혀 놓았다.

이곳에서 지방관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지성껏 참배해 왕에 대한 충성과 어진 정치를 다짐했다. 동시에 관용 여행자들이 머무는 숙박처로도 사용했다. 지방 군현에서 관아가 있는 곳을 읍치라고 하는데 객사는 읍치의 맨 중심이며 전패를 모신 관계로 수령의 집무청인 동헌보다 격이 높은 건물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객사는 관아 시설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제일 좋은 곳에 자리 잡는다.

조선시대 청도 객사로 사용했던 도주관은 높이가 서로 다른 세 개의 지붕을 일렬로 맞붙여 놓았다. 여기서 전패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채를 전청이라 하고 전청의 좌우 채를 날개칸 즉 익헌이라 한다. 가운데 채가 좌우 채 지붕보다 한단 높은 것이 특징이다. 한편, 왕의 위패를 모신 건물은 마땅히 `사당`이라 불러야 하는데 객사는 사당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살아있는 이를 제사 지내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객사의 `사`자는 사당을 뜻하는 사(祠)자가 아니고 집을 뜻하는 집 사(舍)자를 쓴다.

198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된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소재 도주관은 건물 앞에 역대 청도 군수들의 선정비가 줄지어 서있고 고종 때 대원군의 명으로 세운 척화비도 서있다. 그런데 근년 도주관 주변에 뚫린 넓은 길이 문화재 경관과는 어울리지 않아 찾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 같다. 객사의 서헌을 복원할 때도 새로난 도로가 복원 공사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종합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