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은 위태위태해 보인다. 조만간 무대에서 스스로 퇴장할 것 같기도 한데, 질질 끌어서 한국의 민주주의 헌법이 보장하는 3심 재판제도를 충분히 활용한 다음에 퇴장 당하거나 간신히 살아남을 수도 있겠다. 어느 쪽으로 결말이 날 것인가? 누구보다도 `부정부패 척결`을 목청껏 외쳐댄 그의 양심은 이미 정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과연 학생들에게 점심밥 주는 방법론을 놓고 `180억 원짜리 주민투표`까지 벌여야 했을까? 주민투표가 발의된 직후에도 나는 `한심한 일`이라고 이 지면을 통해 발언했지만, 지금도 나는 변함없이 `한심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의원이 뒤늦게 “주민주표로 갈 사안이 아니었다”고 지적해 여당 내부에서 회초리 같은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가령, 정몽준 의원은 “한가하신 말씀”이라고 쏘았다.
물론 내 생각과 박근혜 의원의 판단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대화와 협상을 통한 양보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성숙의 기준에서 비판한 것(일종의 이상주의적 비판)이었고, 박 의원은 지방자치단체마다 형편에 맞게 진행되는 무상급식이라는 기준에서 비판한 것(일종의 현실주의적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에는 종종 역설적 결과가 일어나는 법이다. 발의하지 말아야 했을 `주민투표`라는, 내 기준으로는 `어리석고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일이 전혀 뜻밖에도 현실정치의 무대에 서지 않으려 해온 인물들을 그 무대로 불러들이고 있다. 안철수 교수와 박원순 변호사. 두 사람이 대표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누가 이 엉뚱한 결과를 예측이나 했을까? 주민투표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박형준도, 주민투표를 발의한 오세훈도, 주민투표는 `나쁜 투표`라는 선동으로 투표율 떨어뜨리기 운동에 매달렸던 민주당이나 민노당도 정말 그것만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주민투표와는 애써 표면적 거리를 유지하려 했던 청와대도 몰랐을 것이다.
안철수, 박원순은 왜 `서울시장 후보`로서 민심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을까? 내가 보기엔 조금도 복잡하지 않다. 간단하다. 그 참신성과 그 도덕성 때문이다. 서울시장으로서 어느 정도 합당한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민심은 웃어 버린다. 그 웃음에 담은 대답은 “아무려면 정치해온 인간들보다야 나을 텐데, 그 참신성과 그 도덕성만 해도 우리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현재의 민심이 한국정치의 어떤 문제점에 대해 목말라 있는가를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다.
민심의 첫 번째 갈증은 정치와 정치인의 참신성이다. 참신한 정치인이 참신한 정치를 창조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단계에서 `복지`가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대두된 것처럼, 도대체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단계에서 정치집단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피하지 말아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화와 협상을 통한 양보와 타협`이다. 우리의 민심이 언론매체를 통해 날마다 부아를 끓이며 보아온 것은 `너를 죽여서 나만 살자`라는 극한적 대립과 투쟁이다. 공중부양에서 해머까지, 특히 국회는 그 표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 이념적 성향까지 끼어들면 기어코 갈 데까지 가고야 만다. 서울시의 주민투표도 그러한 것이었다.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는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발의한 쪽이든 투표불참운동을 펼친 쪽이든 `학생들 점심 주는 방법론`을 보수와 진보의 진검승부로 몰아가고 말았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단계에서 마침내 절실한 문제점은 참신한 정치이고, 그 요체는 대화와 협상을 통한 양보와 타협의 정치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곽노현의 경우처럼 `돈의 뒷거래`라는 의심을 받게 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오히려 대화와 협상을 통한 양보와 타협의 정치를 타락시킬 뿐이다. 바로 여기서 도덕성의 문제가 심각해진다.
`대화와 협상을 통한 양보와 타협의 정치`가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절박한 정치문화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강한 도덕성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안철수와 박원순. 두 사람의 실체가 곧 적나라하게 드러나겠지만, 현 시점에서 서울의 민심이 두 사람에게 쏠려가는 이유는 명백하다. 한국정치의 참신성과 도덕성에 대한 민심의 갈증이 그들을 부르는 것이다. 비단 서울뿐이겠는가? `깨어 있는 시민`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이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