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얘기지만 스포츠에서 선수는 경기장에서 쓰러져야 한다. 힘이 다 할 때까지 싸우고 지면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그보다 먼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퇴장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이 한창시절 팬들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더욱 멋진 모습을 보이려면 잘 나갈 때 내려오는 것이다. 그래야 떠나면서 뒷꼭지에 비아냥대신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구질구질 경기장에서 제대로 성적도 못 내고 은퇴하는지 마는지 어느 사이 핫바지 방귀 새듯 쓰러지는 선수들, 개인적으로도 안쓰럽다. 멋지게 은퇴하는 선수들도 많다. 앞으로 얼마든지 더 뛸 수 있을 듯한데도 정상에서 내려오는 선수를 보는 것은 감동이다. 숱한 장애를 젖히고 꼭대기에 올라갈 때까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 것인가.
세계여자골프계의 지존 로레나 오초아가 지난해 봄 깜짝 은퇴했다. 그 전까지 골프계의 여제로 군림했던 소렌스탐(스웨덴)을 꺽은 지 3년 만에, 바로 같은 날짜에 은퇴를 선언했다. 그동안 골프계 세계 정상에서 누구의 침범도 허용하지 않았던 그녀는 “1인자일 때 물러나고 싶었다”는 퇴임의 변을 남겼다. 얼마나 깔끔한가. 그녀가 돈 많은 사업가와 결혼하게 됐다거나 더 이상 골프를 할 수 없게 된 때문은 아니었다. 29살은 아직 많은 미련을 갖게 하는 나이였다.
우리나라에도 있다. “팀이 필요로 하지 않는 선수라면 언제라도 유니폼을 벗어야 한다”며 지난 해 가을 쿨하게 그라운드를 떠난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 `야신`이라 불렸던 그는 야구인생 32년에 프로경력 18년차로 2천 안타를 비롯, 각종 기록을 갖고 있었다. 빗 속에 치러진 마지막 경기에서 내야 플라이에도 전력 질주한 그 양준혁은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나 지금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어제 끝난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많은 별들이 사라지고 또 새로 떴다. 재기를 벼르는 선수도 있고 후배에게 길을 열어주고 명예롭게 떨어지는 별도 있다. 옐레나 이신바예바도 그 중 한 사람이다. 29세. 러시아 출신의 여자 높이뛰기 선수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대구스타디움을 찾은 많은 관중들은 내심 그녀의 재기를 기대했다.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번 연속 바를 넘지 못하고 탈락했던 그녀는 대구에서도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왕년의 화려했던 기록들, 세계 기록만도 무려 27개나 갈아치웠고 IAAF(국제육상경기연맹)가 선정하는 `올해의 여자 선수`에 세 번이나 뽑혔던 그녀였다. 2003년 세계선수권을 거머쥔 이후 내리 6년 동안 무패 행진을 이어왔던 그녀였다. 그녀가 내년에 다시 부활할지는 그녀 자신에게 달렸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에게 29세라는 나이가 장애가 될지도 개인의 문제다. 4m85의 기록으로 이신바예바를 뛰어 넘어 우승한 브라질의 파비아나 무레르는 30살이다. 분명한 사실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다.
스포츠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전성기가 다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언론의 하마평들은 벌써부터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5선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내년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세가 불리해지자 먼저 던진 카드라고 폄하한다. 특히 현역 의원들에 대한 물갈이 요구가 드센 우리 지역에서는 자가발전식 반론이 교묘히 세탁돼 여론인 양 공공연히 떠돈다. 파장이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서일 것이다. 스포츠에서도, 정치에서도 박수 받으며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