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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 구분이 분명한 내시집

영남이공대 교수
등록일 2011-09-01 21:48 게재일 2011-09-0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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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임당리 김씨고택, 김씨고택 배치도
조선시대 내시(內侍)는 궁궐 내의 여인들을 넘보지 못하게 생식기를 잘라내야 했다. 조선시대 내시부(內侍府)에는 140명의 내시가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내 살림을 맡아보았으며 결혼을 하거나 양자를 두어 대를 이을 수도 있었고 족보도 만들었다.

내시는 양민 중에서 선발했으며 내시가 되기 위해서는 남근과 고환뿌리까지 모두 거세하게 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 과정에서 지망생 중 80%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거세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면 자신의 고환이 든 항아리를 갖고 궁에 입궐하게 되며 내시가 죽을 경우 항아리에서 남근을 꺼내 봉합한 후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경상북도 청도에 가면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이집을 `내시집`이라 부른다. 이집은 내시가계를 16대까지 이어온 집으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까지 지닌 궁중 내시로 봉직한 김일준(馹俊, 1863~1954)이 낙향하여 지은 집이다.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높아 1988년 9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1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45호로 승격됐다.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 내시집이 국가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이집이 처음이다. 이집의 건축 초창 년대는 사당 지붕의 막새기와에 `강희(康熙)25년 병인(丙寅) 윤4월`이란 명문이 남아있어 1686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건물 구조나 치목 양식으로 보아서는 1800년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가옥의 배치부터 일반 전통가옥과는 다르다. 안채와 작은 사랑채, 고방, 광이 `口`자형 몸채 독립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몸채 바깥에 큰 사랑채가 있다. 건물의 향(向)은 큰사랑채만 남향이고 안채는 서북향, 작은 사랑채는 서남향을 하고 있다. 이곳의 지형조건 상 안채와 작은 사랑채를 얼마든지 남향으로 앉힐 수 있음에도 이집은 그렇지 않다. 몸채 밖의 큰 사랑채 위치 또한 대문채와 몸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대문과 몸채의 중문을 통해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안채와 작은 사랑채의 방향은 임금이 있는 궁궐방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반가(班家)의 구성은 남녀유별 유교적 사상이 철저하게 녹아있다. 그 중 하나가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중문을 설치하고 대문을 들어와 중문을 거쳐야만 안채에 들도록 한 것이다. 안채로 드나드는 아녀자들을 사랑채의 어른이 `은근히` 볼 수 있도록 건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집은 대문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보통 집에는 없는 큰 사랑채 앞을 `반드시` 지나야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흡사 큰 사랑채에서 안채로 드나드는 아녀자들을 감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 유일의 조선시대 내시가(內侍家)인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은 일반 사대부 고택보다 훨씬 더 엄격한 내외 공간 구분을 하고 있는 소중한 건축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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