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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영광 되살리는 문화엑스포를

이경우 기자
등록일 2011-08-17 23:57 게재일 2011-08-1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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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흠 시사칼럼니스트
신라의 삼국통일을 잘못된 역사로 보는 역사관이 논란을 빚은 지는 오래되었다. 단재 신채호로부터 시작된 이같은 역사관은 한 때 우리 정치판의 지역감정과 엉켜 영남권에 대한 엉뚱한 편견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서부터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민족 최초 민족국가 성립으로 보는 견해는 통일신라시기에 발해가 병립해 있었던 사실과 그 이전에도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우리 조상들이 최초의 민족국가로 생각해왔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단재의 그같은 한탄에 동감을 느낄 수도 있고, 식민사관과 일제어용사학자들에 의해 고조선의 실체와 강역이 왜곡되면서 많은 오류와 오해를 빚어온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은 일부의 역사적 폄훼처럼 국격이 형편없는 나라가 단순히 외세인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병합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신라가 비록 적은 영토를 가진 나라지만 일찍부터 세계화된 문화강국이었고 그것이 통일의 잠재력으로 발휘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몽골제국시대에 집필된 세계최초의 세계사로 평가되는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 옛부터 중동지역에서도 신라는 동방의 황금의 나라라고 선망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경주의 괘릉과 흥덕왕릉 앞에 세워진 무신상이 아랍인이란 사실도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1973년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굴된 보금(보물 635호)은 전형적인 그리스 로마시대의 누금세공 무늬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직 이 보금이 전래된 경로에 대한 단정적 증거가 없어 역사의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그러나 고대 기록물과 유물 등을 통해 추정되는 바는 신라의 김씨계 지배세력이 게르만 대이동을 촉발하고 로마를 사실상 굴복시켜 세계 3대제국의 하나를 건설했던 훈족(흉노족)과 같은 민족이란 사실이 그 단서가 되고 있다.

중국 한나라의 압박과 중앙아시아의 혹한 등으로 흉노족이 한 무리는 동유럽으로 이동하고 한 무리는 한반도의 신라와 가야로 이동하면서 신라가 북방의 초원길을 통해 훈제국이 가졌던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직접 받아들이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흉노족의 역사를 이어받은 돌궐족은 터키족으로 현재의 터키국으로 남아 우리나라와 역사적 우의를 맺고 있다.

최근들어 신라를 중국의 문물을 백제나 고구려보다 늦게 받아들인 후진국으로 보았던 이전까지의 사학계 견해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흉노족은 당시 중국의 세계화 선생이었고, 신라는 흉노족이 가졌던 로마제국의 문물을 직수입했던 세계 국가였다. 이 때문에 중국과는 다른 문화를 가졌을 뿐이다. 이같은 초원길을 통한 왕래는 타쉬켄트의 고적에서 발견된 사신도에 신라 사절의 모습으로 남아있고, 신라승으로 중국 밀교의 정통 법맥을 이은 혜초스님은 파미르고원을 넘었던 여행기를 남기고 있다.

유서깊은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12일부터 두달간 여섯 번째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리고 있다. 김관용 경주엑스포조직위원장은 “신라 천년의 문화와 정체성을 살려 세계의 다른 문화와 접목되는 협력문화에 중점을 뒀다”고 강조했다.

신라문화의 정체성은 삼국통일 이후 우리 문화의 정통이고 그것은 신라문화의 세계성과 함께 우리 문화의 세계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당연한 선언이다. 지금 우리경제의 80%이상이 대외교역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이미 선조의 개방성과 세계화의 DNA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문화엑스포가 해를 거듭하면서도 아직 우리의 문화를, 그것도 신라의 후손들이 황금의 보금같은 명품 문화를 세계에 널리 보급하는데는 그렇게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 더 큰 분발이 있어야겠고, 다음 개최지 터키의 이스탄불 엑스포는 이미 `야을르 규레쉬`로 우리문화와의 동질성을 확인한바 있듯이 신라와 터키의 옛 영광을 되찾는 세기적 문화축제로 발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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