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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로 간 희망버스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7-21 23:38 게재일 2011-07-2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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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창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장
지난 7월9일, 장맛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날이었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은 부산 영도 조선소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에서 186일째 농성을 하고 있었다.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 조선소는 배를 만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용접 일을 하던 노동자 200여명이 회사에 의해 정리해고 당했다. 열심히 일하던 노동자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잃은 것이다. 이에 부당함을 지적하고 복직을 요구하며 김진숙이 크레인에 오른 것이다.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출발한 150여대의 희망버스에 나눠 탄 5천여명의 시민들이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역에서 부산시민 2천여명이 합류했다. 7천여명이 폭우 속에서 2시간 동안 공연을 했다. 공연을 마치자 김진숙을 만나겠다며 영도조선소로 향했다. 도중에 경찰 7천여명이 차로 벽을 치고 저지했다. 물대포에 최루액을 섞어 마구 쏘았다. 이정희 의원이 실신해 병원에 이송되고 심상정 의원 등 50여명이 경찰서로 끌려갔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물리적으로 연행함으로써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진리를 실천한 것이다. 이날 희망버스에 함께한 사람들은 백기완, 노회찬, 정동영 등의 정치인과 정당인, 노동활동가, 대학생, 의료인, 종교인, 법조인, 장애인, 철거민, 이주노동자, 청소년, 지식인, 사회적 약자와 일반 시민 등 그 구성원이 다양했다.

한 여성노동자가 농성하는 곳에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뤄진 7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다. 언론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티브이로 중계를 할 만한 사건임에도 티브이에서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해서는 몰라도 좋을 것까지 상세하게 보도하고 이 사건은 마치 어느 마을 이장댁 개가 없어진 것처럼 사소하게 보도됐다. 임기가 남은 공영방송 사장을 해임하고 새로운 인물로 교체한 효과가 확연히 빛을 발하는 대목이었다. 사회를 지탱해주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언론마저도 제 기능을 상실한 것이 우리사회의 현 주소이다.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간 이유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한 여성 용접공의 1인 시위에 5천여명의 사람들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폭우 속을 달려간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 그들 가운데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희망버스를 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진숙의 동지인 노조 집행부는 회사에 항복을 했으니 한진중공업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어도 아닐 것이다. 아마 남의 일이지만 남일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진숙은 단순히 김진숙 개인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가장 아픈 한 단면으로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사회적 강자인 재벌기업이 정리해고 하고 이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을 국가는 법의 이름으로 탄압하고 있다. 김진숙이 뜻을 굽히고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우리사회의 약자들은 갈 곳이 없게 된다.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간 사람들은 김진숙의 패배가 곧 우리사회의 희망이 상실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그런 절박함으로 희망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부산으로 가는 희망버스에 탄 사람들의 구성원이 다양한 것은 사회 각 분야에서 두루 정의가 억압당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란 이름에 억압당하고, 서민들은 양극화의 끝에서 생존에 위기를 맞고 있으며,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은 전쟁의 위기로 내닿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공권력에 의해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의가 억압당하는 시대라 느끼고 있다. 작년과 올해 교양인 사이에 가장 많이 읽힌 책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와 `분노하라!`라고 한다. 우리사회의 약자들과 지식인들은 정의의 실종에 분노하고 있다. 그런 민중의 힘이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게 했다.

2차 희망버스는 공권력에 의해 일단 발길을 돌렸다. 희망버스에 탄 사람들을 해산시켰다고 권력은 성공적 진압이라고 자축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중의 뜻은 물리적 힘으로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5m 고공에서 반년을 버티고 있는 김진숙은 체력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은 또 다른 김진숙이다. 그들을 물리적 힘으로 해산했다고 결코 성공적이라고 안심한다면 큰 착각이다. 그들이 발길을 돌린 것은 힘에 굴복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부산에서 정의가 억압당하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더욱 생생하게 체험했을 따름이다. 그들은 머지않아 3차 희망버스를 탈 것을 기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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