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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의 자세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7-01 23:04 게재일 2011-07-0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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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락/포항장성요양병원장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방향에서 일어나는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재물을 잃는다든지, 직장이나 친구, 또는 가족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급박하게 올 수도 있고, 천천히 자신을 괴롭히면서 닿아올 수도 있다. 아무리 조심성 있게 들어오는 문을 닫아버려도, 고통은 또 다른 문을 배시시 열고 인사를 한다.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것에 연약한 자신을 맡겨 버리는 방법을 종교라고 한다.

막연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앞날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종교를 믿는 자는 자기의 소원을 신에게 호소해, 좋은 결말을 기대한다. 이런 방법에는 순수히 자기의 이득만을 중심으로 하는 굿과 같은 미신에서 자기이외에 인류까지도 생각하는 종교 등 여러가지가 있다. 고급의 종교일수록 남을 위한 기원이 많아진다.

세상에는 `난 사람`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잘난, 성공한, 출세한, 돈을 많이 번, 또는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살이에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있거나, 더 높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래서 흥겨운 콧노래를 부를 수 있다.

또 세상에는 `된 사람`이 있다. 모든 면에서 뒤따르고 싶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다. 이들을 두고 사람들은 `참 사람`이라고도 한다. 우리 사회는 `된 사람과 참사람`, 즉 사람다운 사람,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는 `된 사람`이나 `참 사람`보다는 우선 `난 사람`이 유리하다. 그래서 모두는, `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종교는 신을 믿는 참 사람을 만들려고 한다. 사회에는 여러 종교가 있다. 각 종교는 창시자가 있고, 그곳에는 창시자의 혼과 영, 그리고 창시자의 정신이 들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오면서, 주로 커다란 건물과 제도화된 조직만 성장해 왔다. 자질구래한 교리만으로 꽉 차게 변했고, 창시자의 정신은 소실되어 가고 있다.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과 같이 내용이 없다. 핵심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종교에는 형식과 외형이 성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예수는 이러한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면서 좌판을 밀어냈다. 다른 종교도 난형난제이다. 교파가 형성되는 것은 창시자의 뜻에, 인간의 편견을 가미했기 때문이다.

종교의 믿음은 산을 오르는 것에 비견될 수 있다. 산은 거룩함의 상징이다. 인간은 생활 중에서도, 산꼭대기를 향하여 매일 조금씩 오르려고 노력한다. 등산을 할 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얼마 못가서 기진맥진한다. 무거운 짐을 들고 오를 정도의 어리석은 자는 없다. 올라갈 때는 인생의 짐을 내려놓거나, 버리고 가야 한다. 그래야 도달할 수가 있다.

어떤 자는 등산 준비를 하여 신나게 산을 오르다가, 옆에 있는 맑은 물가에서 짐을 풀어 놓고 가져온 음식을 꺼낸다. 일행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담소도 하고, 즐겁게 여흥을 즐기다가 더 오르지 않고 내려와 버린다. 이것은 평범한 수준의 놀이 문화 활동이다. 종교에서도 그렇다. 대부분은 적당한 신앙의 위치에서 머무르다가 내려와 버린다.

일반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뭔가 이익을 갈망하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자기가 갖고 있는, 오래되고 상호 얽힌 이해관계를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산에서는 쓰레기나 휴지 등을 버려서, 더럽게 오염시키는 행위가 될 뿐이다.

종교에는 창시자의 정신인, 원음을 지켜야 한다. 계속 원음과 자기의 소리를 비교해야 한다. 창시자는 고난이나 박해 등, 인간에게 부정적인 것들을 오히려 축복의 도구로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고난 등은 산을 오를 때, 좋은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신앙은 창시자가 가르치시는 산의 정상을 향한 행진이다. `된 사람, 참 사람`으로 끌어올려지거나, 인간 스스로 올라가는 과정이다. 원음을 향한 끊임없는 조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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