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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음식으로 풀어보는 풍류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6-28 23:36 게재일 2011-06-2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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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신/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

어머니의 손맛들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다. 내 손이 마땅히 이어받아야 할 어머니의 손맛들은 서양식 공부에 신들리듯 흡수된 세대들로 인해 사라지고 있다.

동해안 손맛, 계절 맛으로는 은어와 도다리 물회, 말똥 성게 비빔밥을 최고로 친다. 시절 맛, 제철에 난 음식을 먹는 멋은 풍류다. 영덕 오십천, 울진 왕피천, 형산강 변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면 가장 생각나는 음식이 강줄기에서 잡히는 보리 은어 맛이다.

강에서 잡힌 물고기는 비린내가 당연히 나지만 보리가 익어갈 때 잡히는 보리 은어는 심심산천에서 내려온 차고 맑은 물속, 강자갈에 얽혀 붙은 초록 이끼를 먹고 자라 비린내가 없고 수박향이 난다.

은어를 구워 먹으면 수박 향은 5리 길을 날아 갈만큼 진하다.

은어축제가 강에서 은어를 몰아내는 축제가 되어 버렸지만 보리가 익어가는 초여름, 동해안에서 15㎝이상 크기로 자란 은어의 수박 향은 독특하다.

내륙지방일수록 향이 강하고 씨알이 좋다. 낙동강 하구에서 출발한 은어가 경북 북부지역 내륙지방까지 오려면 700km를 거슬러 올라와야 한다. 그래서 수박향이 강하기로 이름난 안동지방 은어는 임금님 진상품이다.

예전에는 낚시보다 대나무발로 잡았다.

빗발이 강한 한여름에 잡힌 은어는 극상품이 아니다. 초여름에 잡힌 은어라야 통째로 초고추장에 듬뿍 찍어 먹을 수 있지만 수량이 풍부한 한여름 은어는 비린내가 나 구워 먹는 게 좋다.

성질이 마른 은어는 행동이 날랜 만큼 성깔도 급해 강물이 좁은 도랑을 만나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으면 자갈밭으로 튀어 올라 파닥거리다 죽어버린다. 지금은 찾기 힘든 일급수에서 이끼만 먹고사는 은어는 신사이고 귀물이자 고결한 생을 내려놓지 않아서 언제나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한 여름에 잡히는 은어는 요리법도 틀린다. 강변 토박이 들은 무쇠 솥에다 쌀뜨물을 붓고 양념은 간장 고춧가루 고사리 정도만 넣고 끌리면 알을 밴 은어에서 나오는 기름이 둥둥 뜨면 침이 절로 목구멍을 간질인다.

동해안 봄철 음식으로는 이즈음 잡힌 도다리로 만든 물회 역시 명성이 높다. 물회는 동해안에서 특히 포항이 자랑하는 음식이 됐다. 물회를 잘하는 집은 낮에 앉을 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 물회는 손바닥 크기 가자미가 알맞고 가는 뼈가 씹혀야 제 맛이 난다 할 수 있으며 간밤 술독에 빠진 주당들은 한 사발 물회를 먹고 나면 시린 속이 저절로 풀린다.

젓갈이나 홍어는 물론이고 초고추장이 들어가는 우리나라 음식은 모두가 맛, 향이 가장 강렬하다. 하지만 동해안 물회는 초고추장이 들어가지만 강렬하지 않다. 그 것은 도다리 육질이 초고추장의 매운 특성을 흡수하는 조화 때문일 것이다.

신경을 많이 쓰는 책상물림이나 샐러리맨들은 흙과 물을 만지고 가까이하면 피로가 쉽게 풀린다.

도시에 앉아서 천렵(川獵)을 즐기는 방법으로는 물회 한 사발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중년의 근심걱정은 세월에 너무 집착하고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잔득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 번뇌를 피하는 길로 철이 바뀔 때마다 맛있는 시절 음식을 찾는 것도 한 방안이다.

의병장 곽재우는 자신의 호를 망우당(忘憂堂)이라고 지었다. 얼마나 근심걱정 많은 중년 시절을 보내어서 망우당이라고 지었을 까. 망우당이 보낸 한의 세월과는 달리 지금은 왜란(倭亂)도 없고 보리 고개도 없는 세월.

하지만 세상 걱정거리를 한보따리 짊어지고 사는 고된 삶을 살아보니 짐작이 간다. 철학위에 먹는 거다. 웃자는 말이지만 먹는 것이 가장 많이 부딪치는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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