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구상(具常), 소설가 신상웅(辛相雄). 요즘도 대학시절의 두 스승과 늘 정신적으로 교감하면서 `큰 고통이었던 등록금`의 기억에 대한 위안으로 삼는다.
구상 시인은 7년 전 이승을 떠났다. 그 뒤로는 `내 기억과 고인의 저술`이 정신적 교감의 길을 열어준다.
여전히 소주를 마시는 1938년생 신상웅 작가. 이 스승은 인기작가가 아니다. 문학의 상업주의를 경멸한다. 대중이 왕창 팔아준 소설가들과는 문학세계의 격이 다르다. 옹호할 가치를 옹호하는 진정한 작가다. 한국문학사는 그의 중편소설 `히포크라테스 흉상`과 장편소설 `심야의 정담`을 길이 예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는 80년대 중반. 대학가에는 최루가스가 터지지 않는 날이 없었던 것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아가자던 뜨거운 맹세…”라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신상웅 교수 강의시간. 광장에 모이겠다던 학생들이 제대로 안 모이자 운동권 학생대표가 강의실 문을 열었다. “교수님은 지금이 어느 땐데 학생들을 보내주지 않는 겁니까?” 젊은 목소리는 `혁명적 도덕주의`로 뭉쳐져 건방지게 훈계하는 것이었다. 신 교수가 그에게 다가갔다. “무례하게 강의시간에, 기본 예의도 모르는 놈이!” 자그만 손바닥이 매섭게 따귀를 갈겼다.
혹시나 `어용`으로 몰릴세라 많은 교수들이 운동권 학생들에게 빌빌대던 80년대에 감히 그 지도자를 체벌한 신 교수는 유신체제에 저항한 작가였다. 사형선고를 받은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에 적극 나선 적도 있었다. 독재자든 권력자든 상업적 유혹이든 그 앞에서 펜과 양심을 빳빳이 지켜낸 그가 90년 가을의 어느 저녁에 이렇게 토로했다.
“80년대 운동권 학생대표들은 교내에 설치된 커피자판기 운영권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그게 재단비리의 하나니까 자신들이 직접 맡아서 투명하게 학생회 기금으로 활용하겠다는 거였다. 그러고는 총장실 점거해서 뒤로는 학생회장 선거자금 흥정하는 놈들도 있었고… 그때 커피자판기 운영의 투명성을 외쳤던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그 도덕성의 단 5%만 유지해줘도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부정부패는 거의 사라질 거다. 어디 한번 지켜보겠다. 형편없는 자식들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부산저축은행 사건이 마치 급성장하는 괴물처럼 한국의 사회구조적 부패사태로 급성장하는 동안,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80년대를 풍미하더니 마침내 절정에 다다른 듯이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를 쩌렁쩌렁 울린 `임을 위한 행진곡`이고, 또 하나는 이십여 년 전 술자리에서 스승이 탄식한 5%짜리 도덕성이었다.
부산저축은행 사태의 핵으로 지목된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59). 광주일고 출신, 전남대 72학번,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0년 선고받아 10개월 만에 석방. 79년 야학운동을 하던 그의 여동생 박기순씨 연탄가스 중독사. 이렇게 `운동권 명가(名家)`가 탄생한다. 그리고 80년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씨가 계엄군에 맞서다 쓰러졌다. 광주 운동권에서 윤씨와 박씨의 영혼결혼식을 마련했다. 여기에 한 노래가 바쳐졌다.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의 `정권 삼대`를 즐기며 부패의 괴물로 성장한 부산저축은행 사태는 `운동권`의 구역질나는 한 타락상을 폭로한다. 신상웅 작가의 예언이 슬프게도 적중했다. 그 잘났던 도덕성의 마지막 5%마저 돈과 바꿔먹은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해먹은 `똑똑한 보수적 인재들`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영혼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운동권 출신이나 똑똑한 보수적 인재들은 현재 한국사회의 주요 골격이다. 그들의 상당수가 썩었다.
그래서 부패공화국이라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물신(돈)이 군림하고 지배하는 한국사회. 썩은 자들은 다시 뭉쳐서 `임`이 아니라 `돈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 한다.
“얼굴도 양심도 이름도 남김없이/돈 위해 나아가자는 뜨거운 맹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