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농가월령` 유감(有感)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05-06 23:09 게재일 2011-05-06 22면
스크랩버튼
김시종시인
태촌 고상안 선생은 함창현 왕태리(현 문경시 산양면 왕태리)에서 명종 8년(1553년) 태어나고 만 23세때인 1576년 문과 병과에 급제해 선산향교 훈도로 관계(官界)에 첫 발을 내디디셨다. 당시 과거 대과 급제 평균연령이 34세였는데 보통 선비들보다 10년이나 빨리 과거에 올랐다. 영남의 거유일 뿐 아니라 조선 유학자로서 율곡과 쌍벽을 이룬 이퇴계 선생도 34세에 문과를 급제했었다. 소년시절부터 문재가 드러난 태촌 선생은 고지식한 구루한 선비가 아니라 유머가 있는 인간성이 좋은 선비였다. 현감·군수·판관으로 다섯 고을을 역임했다. 함창현감·함양군수·울산판관 등 들과 산과 바다가 있는 고을에서 두루 고을살이를 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유능한 관료였다. 중앙의 관직으로 인사관(人事官)인 정랑(정5품직)도 거쳤다. 중급관리로 퇴임한 뒤 저작에 유념해 `농가월령`과 에세이집격인 `효빈잡기`를 지었다. 태촌 선생의 `농가월령`은 다산의 아들 정학유가 지었다는 `농가월령가`보다 200년을 앞서 지었다. `농가월령`은 일년을 24절기로 나눠 절기때마다 농사에 유의해야 할 사항을 간결하게 적어놓아 한문을 아는 유농들은 한번만 읽으면 곧바로 알도록 해놓았다. 태촌선생도 고을수령으로 농업장려, 조세관장, 학문진흥(향교)의 고유업무네 충실했기 때문에 `농가월령`을 요령있게 집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태촌선생의 문집이 소중한 것은 사후 곧 바로 상재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후손들이 19세기말 고종 때 선조의 유고집을 안잊고 펴내어 더욱 소중한 유고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효빈잡기`는 요사이 시각으로 봐도 재미가 쏠쏠하고 삶의 지혜가 넘쳐난다. 불교의 환생설을 재미있게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사람이 개를 죽이면 개로 태어나고 소를 죽이면 소로 태어난다는데 그러면 사람을 죽이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냐는 물음은 간단한 우스갯말 같지만 환생설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찌르고 있다.

특히 태촌 선생의 `효빈잡기`에는 이순신에 대한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이순신 장군을 가까이에서 보고 적은 이야기는 인간 이순신을 이해하는데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유일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선조(1576년)때 태촌 고상안 선생은 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태촌 보다 여덟살 위인 이순신 장군은 그해 32세로 무과 병과에 올랐다. 비록 문과와 무과로 부문은 달랐지만 조선시대는 양반사회로 문반과 무반이 양대산맥을 이뤘다. 같은 해 과거에 합격했기에 자주 모임에서 마주쳤다. 태촌은 이순신이 급제 초기부터 훌륭한 장수감임을 파악하고 이순신의 비범한 담론을 놓치지 않았다. 이순신은 탁월한 장수감임에도 얼굴생김은 복상(福相)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적었다. 위로 벌어진 입술이 허해 보였던 모양이다. 이순신은 아무리 좋게봐도 얼굴에 복이 없어 보여 죄도 없이 모함으로 파직돼 옥고를 치르고 백의종군 경력도 두 차례나 있고 마지막 해전인 노량전투에서 왜적의 흉탄을 맞고 전사했지만 죽기전에 아들에게 전쟁마무리를 잘 부탁해 살아있는 소서행장이 죽은 이순신 장군에 겨 36계 줄행랑을 놓고 임란은 조선의 승리로 마무리를 했다. 태촌은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으면서도 뒷마무리를 잘해 임금과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고 기록했다. 태촌 선생은 `원균`수사와 `이억기`수사도 가까이에서 잘 관찰하고 사람됨됨이를 예리하게 평가하고 이통제사(이순신)의 잽이 아님을 극명하게 밝혀놓았다. 태촌 선생 문집을 발간하는데 출판비 전액을 쾌척한 문경시청의 쾌거가 모처럼 돋보인다. 문경시민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을 사는 이 땅의 국민들에게 태촌 선생의 문집 `농가월령`을 일독(一讀) 하시기를 간절히 권유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24세가 고작인데 태촌 고상안 선생은 71세 까지 수를 누리셨고 문관·학자·의병장으로 창조적인 삶을 사셨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종합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