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사람의 행로가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다. 해방이 되자 두 사람은 문학가동맹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다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김기림은 모더니즘 비평가이고 임화는 리얼리즘 비평가라는 점에서 이것은 해석을 요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3·8선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김기림은 고향이 함경북도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남는 길을 선택했던 반면, 임화는 전직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서기장`답게` 고향이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월북을 단행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6·25전쟁 과정에서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김기림은 전쟁 과정에서 행방불명되었는데 필자가 읽은 책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느 쪽인지 몰라도 폭격에 의해 숨졌다고 한 것으로 기억된다. 책을 다시 확인해 본 것은 아니라서 다소 불확실하기는 하다. 임화의 최후는 잘 알려져 있는데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 등과 함께 김일성 정권에 의해 미 제국주의의 첩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두 사람의 삶은 모두 전쟁 이후까지 지속되지 못했지만, 필자는 두 사람의 선택에서 어떤 의미심장한 요소를 발견하곤 한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문학적인 협력 관계를 지속해 온 두 사람이 체제선택에서는 왜 그렇게 달랐던 것일까? 또 그렇다면 어느 쪽의 선택이 올바랐던 것일까?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먼저 답해 보면 물론 김기림 쪽이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 공간 때 친일파가 득세하고 이승만 정권의 테러 정치가 판을 쳤던 남쪽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 및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반면에 북쪽은 어떤가. 지금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이라는 손자 권력 세습까지 기도하고 있는 형편 아닌가. 그곳에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기초적인 생존마저 위협받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기아와 궁핍과 인권유린이 지금 북한의 현주소라 해도 틀릴 것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두 사람은 왜 다른 선택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문명에 대한 전망 또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김기림은 기본적으로 서양문명에 대한 관심에서 비평활동과 시 창작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임화는 반면에 KAPF 활동을 주도했던 데서 나타나듯이 처음에는 다다이즘 같은 데 경사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회주의라는 것은 마르크스에서 엥겔스를 지나 레닌을 통과한 후 스탈린에 귀착되는 이른바 `정통 마르크시즘`이었다.
이 정통 마르크시즘은 소련에서는 스탈린주의, 중국에서는 마오주의, 북한에서는 김일성주의 등으로 변형되는데, 그 공통점은 `동양적` 전제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상이라는 것이다. 소련 제국과 중국 제국에서 이 마르크스 사상은 한결 더 독재적이고 전제적인 사상으로 가공되었다. 이 사상은 이질적인 사상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닫힌 체계였고 자신만을 정통이라고 믿는 교조적 체계였다. 임화는 일제 말기에 이 전제적 마르크시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상을 발명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해방 후 월북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김기림이나 임화나 다 중요한 비평가였고 문학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김기림이 서양을 보았던 것과 달리 임화는 `동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는 지금 이것이 매우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이 동양의 일부다. 그러나 한국의 미래는 서양을 바라보는 데 있다. 동양이면서 서양을 바라봄으로써만 우리는 혼합적인 문화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
이 물음을 다시 잠깐 변형시켜 보겠다. 한국은 미국을 중시해야 하는가 중국을 중시해야 하는가. 다 중요하다. 그러나 미국을 바라보기를 멈춘다면 우리의 미래는 위태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