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권력의 주인이 국민인 것은 자명하다. 계약상으로, 국민은 자신의 권력을 대표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그로부터 보호받고 배려받기로 약속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권력자라도 원래의 주인인 국민의 의사에 반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근래의 민주적 제도는 그 위임의 방법을 선거에 두고 있다. 선거는 모든 유권자의 직접적이고 평등한 의사표현의 방법이며,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명령의 방법이다. 이 결정에 의해 국민을 다스릴 권력은 위임되고 주인을 존경할 의무는 확정된다.
이 선거제도가 가지는 가장 큰 맹점은, 이 위임으로 매우 용렬한 권력을 선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수의 반대와 다수의 지지를 업고 선출되는 권력이, 자신을 지지한 주인의 명령에만 복종하고 지지하지 않은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는 경우를 용렬하다고 하는 것이다.
민주제도에서 모든 주권자는 완전히 평등하며, 각 개인이 가지는 존엄은 전적으로 자기 완성적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다수의 의사라고 하여도 단 한 사람의 존엄도 해칠 수는 없다. 하물며 한 집단, 혹은 많은 수의 주인을 무시하는 권력이라면 그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선출된 일본의 민주당 권력을 보면서, 다행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우리는 느긋하게 권력의 향배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항상 우리를 긴장하게 했고,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관찰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는 남의 일이니까 좀 객관적이고 학구적인 태도를 가지고 볼수있게 되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들이 자신을 지지한 세력만이 아니라 지지하지 않은 세력에게 어떻게 봉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민을 중시하는 행보를 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관찰의 대상이다. 그가 원래 정책의 목표로 삼지 않았던 이들을 스스로 주목하겠다고 선언하고 가시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그래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참으로 자신의 권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안다면, 그래서 자신이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활동한다면, 우리는 그의 노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참으로 불행하게도, 그런 선언과 행보가 정치적 수사에 그치고, 진정으로 주인에 대한 복종의 의사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권력의 주인이 아니며, 그를 포함한 어떤 집단이 권력의 주인인 것도 아니다. 그의 권력은 우리에 의해 위임된 것이며, 그를 지지했든 아니든 우리 모두는 권력에게 배려받을 권리가 있고, 마땅치 않으면 언제든 그를 문책할 권리도 있다.
이런 원리는 어디에나 적용된다. 교육은 교육자의 권력이 아니다. 모든 학부모가 전문적인 교육자가 아니므로, 일시적으로 위임한 일일 뿐이다. 누가 감히 자식교육에 대해 부모 이상의 권력을 가지겠다고 한다는 것인가.
신문은 그보다 더하다. 신문은 독자와 국민의 것이다. 국민 모두가 여론의 앞에 나서기에 바쁘므로, 그를 대신하여 언론매체가 있을 뿐이다. 누구도 판단과 여론의 향방을 좌우할 권리는 없으며, 더욱이 그것을 엉뚱한 권력과의 유착으로 사용할 권리는 전혀 없다. 신문이야말로 형체도 없는 권력기관이므로, 구매자만이 아닌 모든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근간의 많은 일들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권력자들을 보면서, 어떤 유력하다는 신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과연 저렇게까지 하라고 위임했던가.
혹시 우리의 위임을 넘어서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가. 혹시 저 노예가 주인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을만큼 지나치게 커버린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