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가 임란 때 세운 공적과 위국 충정의 정신은 후세의 사표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영양 청기, 궁벽한 시골 선비였던 그는 임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하겠다며 무과에 응시해 급제하면서 격동의 시기를 누구보다 뜨겁게 산 분이다.
함양 오 씨로 호가 문월당인 오극성은 청기에서 글만 읽던 선비였다. 그러나 기골이 장대하고 남다른 지모가 있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 부친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라에 큰 변란이 닥칠 것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보인다.
이때부터 유교경전을 접어두고 병서를 읽는 그를 두고 친지들이 성인의 학문을 하지 않고 병서를 읽는 연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문무의 병용이 오래갈 계책이고 시골의 선비라 할지라도 병법의 대략을 알면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병서를 익혔다.
임란 중 권무과(勸武科)에 급제한 문월당은 바로 선전관을 제수 받아 왕의 특명으로, 당시 전선으로 고립돼 있던 삼남(三南)으로 내려가 도원수 권율과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진중을 찾아다니면서 전황을 파악하고 장계로 조정에 보고했다.
이를 바탕으로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서 문월당은 김산의 추풍령과 문경의 조령, 지례의 우두현, 안음의 육십현, 풍기의 죽령, 상주의 낙강 등지에 견고한 산성을 수축하고 허물어져 있는 성주의 가야산성과 합천의 야로산성 그리고 선산의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 대구의 삼가지 산성 등을 수축할 것을 주장한다.
특히 전쟁을 하는 데는 군량이 가장 중요한 만큼 둔전을 시행해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선조가 침전으로 그를 불러 전황을 상세히 물을 때는 삼남지방의 전황을 자세히 전하면서 `당시 군졸들 가운데는 경기지방 출신들이 많아 이들은 백 명이 싸운다 해도 경주와 언양 등 변방에서 심신이 단련된 군사 한명을 당하지 못 한다 며, 난을 피해 산골짜기로 숨어 든 이들을 불러 모아 군사로 삼을 것`을 주장한다.
이 자리에서 왕은 “이 사람이 바로 충신이다.”라며 술을 하사하고 승진을 시킨다. 전란 중 서애 류성룡과 백사 이항복, 오음 윤두수와 백곡 정곤수, 도원수 권율, 우복 정경세와 망우당 곽재우 등에게 보낸 서신에는 구구절절이 나라를 걱정하고 전쟁의 열세를 타개할 방안 등을 제시한다.
특히 임란 중, 중요한 대목마다 기록으로 남긴 80편의 임란 일기는 사료적 가치와 함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그분의 우국충정을 읽을 수 있다.
임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문월당은 벼슬이 황간 현감과 훈련원 판관에 머물렀으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때로는 물러서서 초야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순신의 막하로 동생과 함께 달려가 이순신 장군이 숨진 마지막 전투에도 참전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결연하게 물러나 영양 청기 옥선대 아래에 집을 짓고 자연을 벗하며 지냈다.
58세의 나이로 평양에 지인을 만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숨진 그는 임종을 앞두고 자손에게 이르기를 “내 평생토록 나라에 보답하기를 다 하지 못했으니, 죽어도 오히려 한이 남는다.”며 “부지런히 배우고 몸을 닦아 나라에 충성하라”고 이른다.
5백 년 전 나라의 위기와 함께한 한 선현의 고뇌와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문월당 선생 문집이 안동에 있는 사단법인 교남문화에서 국역작업을 끝내고 곧 책자로 발간한다.
춘추 대전에 보이는 나라가 어려울 때는 급히 나아가고 평안할 때는 양보 한다(急病而讓夷)는 위국 헌신의 본보기가 된, 한 선현의 삶을 이제 누구나 쉽게 접하고 배울 길이 열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