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은 유지될 줄 알았던 한국의 재벌들이 허망하게 넘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부자가 3대를 넘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세간사(世間事)의 이치를 절절히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의 부는 이루는 것도 빠르지만 망하는 것도 신속하다. 수십·수백억원을 삽시간에 벌어 당당한 사업가 행세를 하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기꾼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졸부(猝富)는 졸망(猝亡)`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싶다.
그런데 부자 3대(代)를 못 간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3대도 아닌 무려 12대에 걸쳐 300년 동안 졸부가 아닌 존경받는 명부가문(名富家門)이 있었으니, 그 가문이 바로 한국의 경주 최 부잣집이다. 그렇다면 최 부자 가문이 12대에 걸쳐 300년 동안 부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 비밀은 바로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이 집안의 여섯 가지 가훈에 숨어 있다.
경주 최 부잣집의 가훈과 원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악착같이 `재산 늘리기`가 아니라 오히려 `나눔의 정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철저했던 것이다.
즉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간다.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간 관리자를 세운다.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한다.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지나치게 재산을 불리지 않는다.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한다.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게 한다.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는 최 부잣집의 경제관은 우리 사회의 부자들이 나아갈 길, 그리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최 부잣집의 가훈과 원칙을 음미하다 보면 로마 천 년의 철학이 생각난다. 시오노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가 천 년을 지탱하도록 받쳐준 철학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는 것이다. 이를 번역하면 `혜택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들이 솔선수범하여 최전선에 나가 피를 흘렸는가 하면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금쪽같은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곤 하였다. 귀족은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여기서 로마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나왔다. 이것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들의 삶의 질을 더 높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아서일까? 선진국에 비해 우리 사회지도층의 기부문화는 초라하다.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전통도, 자녀에게 나눔을 가르치는 가정교육도 없다.
천박한 사치의 문화, 과시의 문화는 만연해 있으나 나눔의 문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부를 축적한 신흥 노블레스는 생겼으나 그들은 오블리주를 행하지 않는다.
흔히 빌 게이츠를 `가진 자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으로 비유하지만 존경받는 부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우리나라에도 경주 최 부자와 같은 참다운 부자, `가진 자가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노블레스 오블리주` 멋진 부자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어떤 국가든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나라의 위상에 걸 맞는 시대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은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이다.
한국이 강하고 품위 있는 국가로 오랫동안 존속하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을 확립해야만 한다.
구한말 나라가 망하자 선조들이 피땀으로 일구고 지켜온 300년 부와 전 재산을 정리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인재양성을 위해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하고 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진 마지막 최 부자 최준! 그는 어느 노스님에게서 받은 다음의 금언을 평생 잊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는 요즘, 경주 최 부자와 같은 상생과 나눔의 정신이 우리 사회, 우리 조직에 꼭 필요한 덕목은 아닐까?